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1년을 논평한 이들은 예외 없이 '소통(疏通) 부재'를 지적했다. 다양한 배경과 성향을 지닌 이들의 생각과 논법이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소통은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라는 사전 풀이를 상기하면, 이 대통령은 이를테면 '꽉 막힌 대통령'이라는 얘기다.
이건 좀 불경스럽고, 본인도 자못 억울할 듯하다. 소통은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는 다른 풀이에 비춰보면, 이들 지식인이나 사회와 뜻이 잘 통하지 않아 서로 오해가 많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결 낫다. 아직 누구처럼 '구제불능'은 아닌 게 된다.
소통 대상과 방법 적절해야
그런데 엉뚱하게도 '소통'이 과연 만병통치약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학적으로 만병통치약은 없다. 오히려 약을 아무데나 쓰면 건강을 해친다. 소통도 대상과 방법을 적절히 가려야 탈없이 온전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맞춤하지는 않지만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간섭' 논란도 부적절한 '소통'에 빗대어 볼만하다. 그는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촛불집회 관련 집시법위반사건의 재판을 독촉하는 이메일을 법관들에게 보내 '재판간섭' 의혹이 제기됐다. 야간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에 대한 위헌심판을 기다리지 말고 재판을 마무리할 것을 권고했다지만,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맡은 법관들과 무리한 '소통'을 꾀한 것 자체가 부적절하게 비친다.
그는 "대법원장님의 생각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거나 "헌재를 포함해 안팎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넌지시 상층부와의 '소통'을 강조했다. "머물던 자리가 아름다운 판사로 소문 나기 바란다"는 등의 묘한 말도 했다. 정작 대법원장은 "판사들이 그 정도를 압력으로 느끼겠나"고 짐짓 가볍게 논평했다. 의도가 무엇이었든 실제 압력을 느낄 정황이 아니라면 엄중한 문책은 어렵다. 사법부 수장의 경륜이 돋보인다. 그러나 사법권 독립을 스스로 부정하는 '재판간섭' 논란을 부른 수상쩍은 행적을 말끔히 지울 수는 없다.
대통령의 '소통' 문제로 되돌아가자. 이 대통령은 어제 아침 귀국 길의 라디오 연설에서 경제살리기를 위한 '초당적 협력'을 거듭 당부했다. 해외 순방국 여야 지도자들이 위기극복을 위해 단합한 모습을 보았다며, "정부가 하는 일을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소통 부재'를 탓하는 이들을 거꾸로 "꽉 막혔다"고 나무란 셈이다.
반응은 어차피 극단으로 갈릴 것이다. 그만큼 우리 정치와 사회의 논쟁은 이기적 이해를 토대로 견고하게 구축한 참호 속에 웅크린 채 '소통'을 거부하는 세력이 이끌고 있다. 이런 판국에 남 탓을 해봐야 얻을 건 별로 없다. 자칫 '소통 부재'를 넘어 '구제불능'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병통이 무엇이든 치료법, 타개책은 없을까. 이젠 이마저 진부한 느낌이지만 오바마의 '소통 전략'을 참고할 만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국민 지지에도 불구하고 위기극복을 위한 경기부양책을 관철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지리멸렬한 듯하던 공화당은 하원에서 일사불란하게 경기부양법안을 반대, 오바마에게 좌절을 안겼다. 그러나 그는 반대 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초당적 협력'을 설득하기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세력 고립"이 성공 전략
이를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다. 원칙과 국민 이익을 해친다는 우려가 많았다. 과거 이라크 전쟁과 규제완화 등에 초당적으로 협력한 과오를 반복한다는 비판도 거셌다. 흔히 떠드는 '초당파주의(bipartisanship)'는 정략적 타협일 뿐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냉철한 분석가들은 이를 오바마 특유의 소통 전략으로 평가한다. 특히 그 대상은 공화당이 아니라 국민이다. 완고한 반대세력과의 소통과 초당적 타협을 위해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과시, 이들을 사회적 논쟁에서 고립시키려는 고도의 정치전략이라는 것이다. 오바마의 성공은 부시의 실패에 기대어 거저 얻은 게 아니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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