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순방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첫 대면한 스위스 제네바의 회담장에서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미-러시아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클린턴 장관은 6일 만찬을 겸한 회담이 시작되기 전 라브로프 장관에게 초록색 리본으로 묶은 손바닥 만한 상자 하나를 선물했다. 라브로프 장관이 포장을 풀자 똑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빨간색의 버튼이 달린, 노란색과 검은색이 섞인 플라스틱 상자가 나왔다.
지난달 독일 뮌헨에서 열린 유럽안보회의에서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이 "미-러 관계의 리셋(reset) 버튼을 누르겠다"고 한 발언의 상징물이다. 물러서지 않는 '터프한' 외교관으로 소문난 라브로프 장관도 뜻밖의 선물을 받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클린턴 장관이 채근하자 카메라 앞에서 함께 버튼을 누르는 포즈를 연출했다.
화기애애한 장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클린턴 장관이 버튼 밑에 새겨진 'reset'이란 영어와 '페레그루즈카(peregruzka)'라는 러시아어를 가리키며 "제대로 된 러시아 말을 찾느라 고생했는데, 제대로 됐느냐"고 묻자 라브로프 장관은 무뚝뚝한 어조로 "틀렸다"며 철자 두개가 빠졌다고 응수했다.
그는 리셋의 러시아 말은 '페레자그루즈카(perezagruzka)'인데, 여기 써있는 말은 '과부하, 과충전'의 뜻이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클린턴 장관이 "러시아가 미국에게 그렇게(과부하, 과충전) 하기 않기를 바란다. 나나 라브로프 장관이나 일 때문에 과부하가 걸린 건 맞다. 번역이 전혀 틀린 건 아니다"고 하자 회담장에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는 '두 장관이 잘못된 버튼을 눌렀다'는 제목을 달았다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2005년 콘돌리사 라이스 전 국무장관과 라브로프 장관이 처음 만났을 때는 이와 딴판이었다. 당시 라브로프 장관은 라이스 장관에게 러시아가 불만을 갖고 있는 긴 목록을 주면서 초면부터 압박했다. 라이스-라브로프의 관계는 이후 회복되지 못했다.
두시간 가량 계속된 회담에서 두 장관은 올해 말로 시한이 만료되는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I)의 후속 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를 포함한 이란 핵문제, 아프가니스탄 안정화 등 다양한 국제현안을 논의했다. 그루지야 사태, 러시아의 인권 등 민감한 사안도 가감 없이 의제에 올랐다. START-I과 관련해서는 실무계획(work plan)을 진행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클린턴 장관은 회담 후 "솔직한 의견교환이 오갔다. 매우 생산적인 대화였다"며 "이제는 말을 행동으로 '번역'할 차례"라고 말했다. 라브로프 장관도 "모든 문제에서 다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이슈를 다 다루기로 동의했다"며 "굉장한 개인적 만남"이라고 화답했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둘의 회담이 양국관계를 재건하는 '추축이 되는(pivotal) 순간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달 2일 영국 런던의 주요20개국(G20) 금융정상회의 개막 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첫 양국 정상회담에서 전략무기 감축을 포함한 획기적인 합의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무성하다.
물론 난제도 많다. 라브로프 장관이 이날 거론한 것처럼 러시아는 군축협상에서 핵탄두 뿐 아니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 등 전략무기 운반체계까지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START-I의 대체협정은 핵탄두에 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동문제에서도 러시아는 중동 전역의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중동의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으로 의심받는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인 동시에 러시아가 이란에 원자력시설을 제공하는 것을 합법화하겠다는 의도이다.
워싱턴=황유석 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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