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 판사들에게 전방위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촛불집회 사건 배당 의혹에 이어 판사들에게 이메일로 사건 처리를 종용한 사실이 밝혀졌고, 헌법재판소장을 개인적으로 접촉했다는 정황까지 드러나더니, 애초 보류됐던 촛불 재판이 그의 의도대로 갑자기 처리됐다는 의혹마저 나왔다.
촛불집회 때 일반교통 방해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의 변호를 맡았던 김종웅 변호사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11일께 서울중앙지법의 담당 판사가 김 변호사에게 먼저 연락해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보고 선고하겠다"며 16일로 예정된 선고를 미루고 변론재개를 신청하도록 요구했다.
이틀 전인 9일 박재영 판사가 야간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데 따른 판단이었다. 그런데 변론이 재개된 12월 9일 재판부가 별 이유없이 "9일 후 선고하겠다"고 입장을 바꿨고, 18일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신 대법관이 판사들에게 재판을 '통상적으로' 처리하라고 당부하는 이메일을 세 차례 보낸 10월 14일~11월 24일과 맞물린다.
신 대법관의 이메일이 재판부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이다. 이에 대해 해당 판사는 "당시 변호사가 동의해서 선고기일을 잡았고, 벌금도 다른 피고인에 비해 과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신 대법관이 일반 시국사건에서도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신 대법관은 대법관 임명 제청 직전인 지난해 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전교조 소속 교사 2명의 사건을 담당한 형사단독 판사에게 전화로 재판의 연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대법관 자리를 목전에 두고 있던 신 대법관이 정권에 민감한 결정을 막으려 미리 영향력을 행사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판사는 1월 21일 교사들에게 결국 무죄를 선고하고 2월 정기 인사에서 법원을 떠났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해 신 대법관은 대법원 공보관을 통해 "보도에 대해 강력 항의하는 바이며, 정정보도 등 조치를 취하겠다"며 강하게 부인했다.
이처럼 의혹이 증폭되면서 법원 안팎에선 신 대법관이 사법부 전체에 부담을 안겨주기 전에 거취를 정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고참 부장판사급의 한 법관은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 봐도 신 대법관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중견 법관도 "그대로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됐는데, 대법관에게 정직이나 감봉 등의 징계를 내릴 수 있겠느냐"며 사퇴의 불가피성을 언급했다.
■ 申대법관 "압력 느꼈다면 판사가 문제"라지만
신영철 대법관은 자신이 지난해 형사단독 판사들에게 촛불집회 재판을 미루지 말고 '통상적으로' 처리하라고 종용한 데 대해 "법이 규정한 취지를 전달한 것"이라며 문제 될 게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이메일을 받은 일부 판사들이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면, 신 대법관의 이메일을 정당한 사법행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상당수 판사들은 신 대법관이 이메일에서 보편적 양형을 주문하고 위헌심판이 나오기도 전에 사건의 '통상적인' 처리를 주문한 것은 사실상 재판에 대한 간섭, 나아가 인사권자의 부당한 재판 개입으로 보고있다.
서울지역 법원의 한 판사는 "법원장이 '대외비''친전'을 강조하며 수 차례 이메일을 보낸 것은 압력으로 이해될 소지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판사는 "더구나 단독 재판부 판사들은 합의부 판사들과는 달리 법원장에게 직접 인사평가를 받기 때문에 법원장의 말 한마디에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판사들은 특히 신 대법관이 이메일에서 "대법원장도 대체로 생각이 다르지 않은 것으로 들었다"고 언급한 대목을 문제 삼았다. 한 부장판사는 "대법원장이 사실상 재판의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으로, 이를 밝힌 신 대법관의 행위는 물론 사실여부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법원 일각에서는 법원 수뇌부가 전체 시국사건에 대해 모종의 의도를 갖고 접근한 게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 박재영 전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지난달 초 법복을 벗으면서 밝혔던 소회를 다시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는 당시 "내 생각이 정권의 방향과 달라 공직에 있는 게 힘들고 부담스럽다"고 밝혔다.
그때 법원 안팎에서는 "사법부가 엄연히 독립돼 있는데 왜 법관이 정권의 방향을 운운하느냐"며 "박 판사의 주장은 생뚱맞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이후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은 그의 발언이 '뜬금없는 돌출행동'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법원장의 수 차례에 걸친 이메일 '당부'가 판사들에게는 단순한 참고사항이 아니라, 재판에 대한 상당한 압력으로 인식되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이영창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