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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장편소설 '부코스키가 간다'/ 청년백수, 일상을 미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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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장편소설 '부코스키가 간다'/ 청년백수, 일상을 미행하다

입력
2009.03.0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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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만성적인 경기불황의 무대가 돼버린 서울. 비정규직의 전면화, 실업의 일상화 같은 고단한 세상살이는 청년들로부터 희망을 빼앗아가버린 지 오래다. 여기 가난하고 무력한 이 시대의 백수, 신 빈곤계급의 한 청년이 서울 거리를 걷는다. 그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한재호(30)씨의 장편소설 <부코스키가 간다> (창비 발행)의 주인공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몇 년째 대학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청년.

"매일 쓰레기같은 이력서를 쓰고, 가끔 '아는 사람'의 경조사에 참석하고, 텔레비전으로 유재석을 보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는" 혹은 "매일 잡코리아나 사람인에 들려 쓸 만한 업체를 찾아다니며, 연봉을 조사하고, 욕을 뱉고, 회원게시판을 뒤지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단조롭던 그의 일상에 묘한 활기가 돌게 되는 계기는 비만 오면 가게문을 닫고 외출한다는 '부코스키'라는 사내의 수상한 사연을 듣게 된 것이다. 우연히 동거하게 된 백수 여자친구의 부추김에 결심을 굳히고 부코스키를 따라 나선 주인공은 충무로에서 종로로, 삼성역에서 강남역으로, 범계역에서 노원역으로 종횡으로 서울을 가로지르며 미행을 계속한다.

작가가 의도했던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느리고 끈적한 랩음악 장르를 의미하는 '슬로우 잼'. 작가는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는 주인공의 우스꽝스러운 미행을 장황하게 묘사한다.

탐정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긴장감보다 나른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세대는 목표가 없는, 아니 딱이 목표를 찾지 못하지만, 모두가 무한경쟁에 내몰린 세대, 그 무력감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세대"라고 규정한 작가의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일 테다.

고투에 가까운 주인공의 집요한 미행 묘사와 비례해 부코스키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될 만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부코스키의 존재는 무엇인지, 주인공이 왜 부코스키를 미행했는지 따위의 질문은 의미가 없어진다.

부코스키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오히려 자신을 미행하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 주인공이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내가 알아서 가도 되나?"라고 독백하는 장면은 함축적이다. 부코스키 따라다니기 같은 무의미한 행위에라도 몰두하지 않으면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일할 권리를 빼앗긴 세대의 슬픔'이 처연하게 묻어나는 장면이다.

"뽑히지 않더라도 저희 회사와 좋은 인연으로 남길 바란다"고 무심하게 말하는 면접관, "젊을 때부터 통장을 관리하고 종잣돈을 만들어라. 무능할수록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꼼꼼히 투자하라"며 자신의 새 아파트를 자랑하는 예비군 동대장 등 기성세대를 지나칠 정도로 속악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도 '세대 갈등'의 표면화를 예고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동국대 국문과를 9년 만에 졸업한 뒤 몇년간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의미한 구직활동을 반복하기도 하다가 이 소설을 건져냈다는 한씨. 그는 "이제까지 소설이 나 혼자만의 놀이였다면, 앞으로는 밥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이었으면 좋겠다"며 "반복과 변주가 잘 어울려있는 백민석씨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음악적 문장을 꿈꾼다"고 말했다. 제2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이다.

이왕구기자

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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