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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규 두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 '농촌적 상상력' 넘치는 비유의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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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규 두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 '농촌적 상상력' 넘치는 비유의 텃밭

입력
2009.03.0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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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봄이 젊은 여성들의 옷차림새나 혹은 묵은 때를 벗은 보도블록에 피는 아지랑이에서 느껴진다면 농촌의 봄은 대지의 목축임으로 다가온다. 닫혔던 저수지의 문이 열리고 농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 논두렁 위를 넘실거릴 때 농부들은 비로소 봄을 몸으로 느낀다.

봄이 왔는지, 경기 화성시 정남면 나고 자란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짓고 사는 시인 이덕규(48)씨의 상상력에도 봇물이 터졌다. '보통리 저수지 수문이 열렸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굳은 안면 근육을 풀고/ 제방 밑 칠흙 같은 암거를 빠져나온/ 싯푸른 물결이/ 꼭 일년 만에 암내 맡은 짐승처럼/ 입가에 허옇게 거품을 물고/ 동네방네로 달려간다네…'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농부시인으로 불리는 것이 별로 기껍지는 않아요. 직업이 농업일 뿐이죠. 농촌 얘기는 내가 사는 곳이 농촌이니까 나오는 거겠죠. 그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라는 시인. 그러나 그는 두번째 시집 <밥그릇 경전> (실천문학 발행)에서 점점 드물어져가는 그래서 더욱 귀해져가는 농촌적 상상력을 발휘해 비유의 텃밭을 일구어낸다.

농가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지게를 관찰하던 이씨가 '짬짬이 벌렁 자빠져서/ 이내 코를 고는 저 태평한 년은/ 또 세상 모르고 낮잠만 자네'('작대기가 지게에게')와 같은 해학 섞인 비유를 만들어내거나, 논 한가운데서 젠체하며 서 있는 해오라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 '또 캄캄한 한 생을 빨아 헹궈낸/ 저 희디흰 단벌의 정신'이라고 노래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이씨의 이같은 비유 속에는 꿈틀거리는 생명력이 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내 알아차리겠지만 그 생명력의 수원지는 도시의 상품화된 쾌락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원초적인 성(性)이다.

"농촌은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병든 곳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건강에 집착하게 되지요"라는 시인은 "모든 생명의 기본단위인 섹슈얼리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밭 가운데 오도마니 서 있는 고장난 경운기 한 대, 그 심상한 풍경을 시인은 '쟁기질 하던 낡은 경운기 한 대가 보습을 흙 속에 박은 채, 밭 가운데 그대로 멈춰 서 있다/ 평생 흙 위에서 헐떡거리다가/ 한 순간 숨이 멈춰버린 늙은 오입꾼처럼' ('복상사'에서)이라고 스케치하기도 하고, 개똥 무더기 위에 달라붙은 복숭아 꽃잎 한 장을 발견하고는 '옅은 바람이 불 때마다/ 도화(桃花) 년은 하르르/ 하르르 진저리를 치고/ 시커먼 개똥쇠는/ 히죽이죽 웃습니다/ 서로 죽고 못삽니다' ('찰떡궁합'에서) 라고 능청스러운 웃음을 짓기도 한다. .

그의 이번 시집은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2003)보다 농촌ㆍ자연의 세계에 대한 천착이 더 끈질기고, 에로스적 상상력이 농밀해졌다는 평이다. 화성 토박이인 이씨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거제도의 도로건설 현장관리자로 일하다

1996년 고향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고 있다. 7,000평 정도의 논농사와 자신이 먹을 만큼의 채소 농사를 짓고 있으며, 때로는 자신이 집 근처에 직접 지은 황토집을 찾아오는 김근, 김경주, 김민정씨 같은 후배 시인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고 한다. "시집을 내고 나니까 헛헛하네. 이제 좀 놀아볼라고… 허허허."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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