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후반기인 2006년 11월 13일. 공정거래위원회 권오승 위원장이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없애는 대신 순환출자 금지를 추진하려다 다른 경제부처와 재계 반발로 좌절되자 간부회의에서 저항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 내려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한국의 공정거래법을 개척해온 그가 자신의 원칙이 좌절된 것에 대해 외로운 심경을 드러내면서도, 소신을 지켜가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23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그가 순환출자 금지카드를 꺼냈던 것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 억제를 위해 도입된 출총제가 재벌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막지 못하면서 투자는 막는 등 부작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상호출자를 제한하는 출총제는 5공시절인 1986년 도입 이후 잦은 제도 변화와 예외 인정으로 누더기로 전락했다. 권 위원장은 재벌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차단하면 총수가 소수의 지분을 뻥튀기해 계열사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고 본 것이다. 오너의 계열사 장악을 차단하는 데는 순환출자 금지가 더 강력한 무기인 셈이다.
예컨대 삼성의 경우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 중 삼성생명이 주력사인 삼성전자에 대한 출자를 못하게 되면 이건희 회장의 계열사 장악이 어려워진다. 재계는 당시 순환출자 금지방안에 대해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격"이라며 반발했다.
실효성은 떨어졌지만, 재벌 개혁의 상징인 출총제가 마침내 폐지됐다. 지난 23년간 우여곡절을 거쳐온 출총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또 다른 친기업 법안인 금산분리 완화법안의 국회 통과는 여야간 정쟁에 밀려 4월 임시국회로 넘어갔다. 참여정부가 출총제와 금산분리를 재벌개혁의 금과옥조로 삼았던 반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강조한 이명박 정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재계는 그 동안 출총제 족쇄만 풀리면 기업 투자가 살아날 것처럼 강조했다. 하지만 투자가 당장 늘어날 것 같지 않다. 상위재벌을 제외하곤 대부분 살아 남는 게 발등의 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 시민단체는 재벌에 대한 시장감시기능이 없는 상태에서 출총제만 없애면 불공정행위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상호출자와 순환출자는 재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단골 메뉴였다. 소수의 지분을 가진 총수가 상호출자와 순환출자를 통해 문어발 확장을 꾀하고, 중소기업과의 불공정경쟁으로 기업생태계를 교란한다는 것이다. 환란 후에는 유례없는 반재벌 3자연대가 형성됐다. 지금은 철저히 망가진 월가의 주주자본주의를 맹신하는 신자유주의 학자, 관료, 진보적 지식인 및 노동운동가들은 재벌개혁 기치 하에 공동보조를 취했다.
반재벌 3자 연대는 상호출자, 순환출자가 우리 재벌에만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원죄는 정부에 있다. 정부가 2차 대전 후 맥아더사령가 일본재벌을 해체하고, 재벌을 지탱한 지주회사도 금지한 것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채 일본 상법을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국내 기업들은 사업지주회사 중심으로 상호출자 형태의 그룹경영을 하다가 공정위가 이를 규제하자 순환출자로 옮겨간 것이다.
처음부터 지주회사를 허용했다면 상호출자, 순환출자가 상당 부분 해소됐을 것이다. 공정위가 상호출자를 제한하고 순환출자의 고리도 끊어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라고 권유한 것은 우리나라 상법이나 공정법 역사를 감안할 때 적반하장으로 볼 수 있다(신장섭 저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 참조). 한국경제,>
기업성장 막는 규제 풀어야
탐욕을 상품화했던 월스트리식 주주자본주의와 금융시스템은 지금 처참하게 붕괴되고 있다. 앵글로색슨식 주주중시 경영을 내세워 재벌 때리기에 앞장섰던 신자유주의 학자들의 입지도 좁아졌다. 출총제 폐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재벌은 글로벌기업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소수주주 보호 등을 위한 규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재벌들이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는 불필요한 족쇄는 과감히 풀어줘야 한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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