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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신입생 환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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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신입생 환영식

입력
2009.03.09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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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관들은 막 과거에 급제한 신참 관료들에게 '신참례(新參禮)'라는 환영식을 열어줬다. 기녀가 낀 술판이 차려지면 신고식이 시작됐는데, 적당히 말린 거름을 중국산 분가루라고 속여 신참 얼굴에 바르게 하거나, 부엌 벽을 문질러 그을음이 잔뜩 묻은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게 하는 엽기 행각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술자리 비용은 신참 몫이었다. 술이 오르면 선배들 앞에서 노래도 불러야 했다. 조선 전기 학자 성현(成俔)은 수필집 <용재총화> 에서 신참례의 목적을 "선후(배)의 차례를 보이고, (새 관료의) 교만한 기를 꺾고자 함이다"고 적었다.

▦프랑스에서는 새 학기가 되면 '비쥐'(신입생을 일컫는 속어)를 골탕 먹이는 '비쥐타주'라는 신고식이 진행된다. 밀가루와 달걀 세례를 한 뒤 구걸을 시키고 진흙탕을 뒹굴게 하는 등 가혹 행위가 며칠간 계속된다. 인도 대학가에도 '래깅'(Ragging)이라는 신고식이 있다. 신입생은 선배의 명에 따라 짓궂은 심부름을 해 주거나 속옷 차림으로 거리를 질주해야 하는데, 신입생 폭행 등의 폐해가 커지자 인도 남부의 한 주는 래깅 금지법까지 만들었다. 최근엔 신입생에게 산 금붕어가 든 물을 마시게 한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엽기 신고식이 화제가 됐다.

▦새내기 신고식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새 구성원들이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할 수 있도록 금시초문의 경험을 겪게 하는 데에는 시ㆍ공간의 차이가 없다. 모욕감이 들 만큼 혹독한 과정을 거친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조직에 대한 애착이나 충성심이 강하고 활동도 활발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니, 신고식은 필요악인 듯하다. 그러나 음주에 편중된 우리 대학가의 신입생 환영회를 통한 신고식은 위험천만이다. 10여년 전 신입생에게 술을 먹여 숨지게 한 선배에게 유죄가 선고된 이후 많이 달라졌다지만 대세는 여전히 술이다.

▦올해도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새내기 등 2명이 만취한 나머지 기숙사와 콘도에서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부랴부랴 학내 음주사고 예방활동을 전개해 달라고 전국 348개 대학 총학생회장에게 편지를 띄웠다. 꽃다운 열아홉, 스물에 술 때문에 급사한다면 그런 원통한 일도 없다. 꼭 술이 동원돼야 새내기에게 동일체 의식을 심어주고 결속을 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술이 약한 이에게 강권하는 것은 폭력이다. 모두가 즐겁게 감내하고 참여할 수 있어서 전통이 될 만한, 재기발랄한 신고식을 고안해 보면 어떨까.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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