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강호순, 입정하세요."
재판장 지시가 떨어지자 연쇄살인범 강호순(39)이 법정에 들어섰다. 푸른색 수의를 입은 그는 양쪽에서 팔짱을 낀 교도관 2명에 이끌려 피고인석에 섰다. 이어 주소, 본적 등을 묻는 재판장의 인정심문에 비교적 또렷하게 답했다. 반성보다는 어딘지 화가 난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재판이 진행된 55분 내내 그는 의자에 기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종종 길게 눈을 감았다.
강호순에 대한 첫 공판이 6일 오후 2시 수원지법 안산지원에서 형사1부(부장 이태수) 심리로 열렸다. 401호 재판정에 마련된 방청석 100여개는 개정 2시간 전부터 방청권을 받으러 온 일반인과 취재진으로 가득 찼다. 피해자 가족이 참석해 분노를 표출할 경우에 대비, 법원 경비관리대 요원 18명이 배치됐지만 재판 중 소란은 없었다.
이날 검사석엔 쌓은 높이가 1m를 훌쩍 넘는 방대한 수사 기록과 함께 담당 검사 3명이 자리했다. 검찰은 2005년 10월 네 번째 부인과 장모 방화 살해(존속살해 및 방화치사 혐의 등)와 2006~2008년 부녀자 7명 살해(살인 및 강간 혐의) 부분으로 나눠 공소 사실을 낭독했다. 추가 자백한 정선군청 여직원 살해 사건은 유전자 감식이 늦어져 이번 기소 대상에서 빠졌다.
검찰은 먼저 강호순의 보험금 사기 혐의를 일일이 나열한 뒤 "개 사육 농장과 마사지업소 경영난을 겪던 피고인이 예전부터 저질러온 보험 사기 수법을 동원, 부인 명의로 보험을 들고 장모까지 죽여 단독상속인 지위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강호순이 사건 5일 뒤 보험사에 전화를 걸어 보험금 수령을 문의한 육성 녹음을 기소 이후 확보했다고 밝혔다. 부녀자 살해 동기에 대해선 "범행 후에도 보험금을 금세 받지 못해 경제난이 지속되고, 부인을 죽였다는 죄책감까지 겹치면서 여성을 상대로 강간과 살인 행각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이날 법정에선 공소 내용과 재판 절차를 놓고 검찰과 국선 변호인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김기일 변호사는 "방화 치사 혐의를 적용하면서 구체적 범행 방법을 공소장에 밝히지 못한 데다, 피고인의 성적 편력, 과시욕 등 사건과 무관한 사항을 나열해 재판을 호도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피고인이 방화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데도, 방화 관련 수사 기록을 아직 보지 못했고 접견도 구치소 아닌 검사실에서 15분 동안 가진 게 전부"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검찰은 "대구지하철사건 등 방화 사건의 판례를 살펴보면 피고인이 불을 냈다는 간접 증거만으로도 유죄가 인정된다"고 공박했다. 또 "강호순 스스로 밝힌 살인 동기나 방화 혐의를 부인하는 이유가 상식적 수준에선 납득할 수 없는 것이어서 비정상적 성격과 심리 상태를 불가피하게 언급한 것"이라고 말했다.
양측은 논쟁 과정에서 "재판은 사람이 아니라 죄를 다루는 것"(변호인) "죄만 따지는 게 아니라 죄를 진 사람을 심판하는 것"(검찰)이라며 뼈있는 설전을 벌였다.
이날 검찰과 변호인은 집중심리제를 도입해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는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11일 공판을 열어 피고인이 혐의를 인정한 부녀자 살해 부분을 우선 처리하고, 법적 공방이 예상되는 방화 관련 부분은 16일 3차 공판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안산=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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