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외 엮음/학과지성사 발행ㆍ488쪽ㆍ1만5,000원
7일은 시인 기형도(1960~1989) 20주기가 되는 날이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와 같은 어두운 이미지가 가득한, 그의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은 이후 수많은 문학청년들의 가슴에 청춘의 화인(火印)을 찍었다. 입속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는 그의 20주기에 나온 추모문집이다. 지인과 문우들의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이 문집의 편집위원이자 고인과 '목욕탕을 함께 갈 수 있는 사이였다'는 대학친구 성석제씨. 그는 대학시절 문학상을 먼저 받은 기형도 시인이 상금으로 수동타자기와 세계문학전집을 들여놓은 뒤 가늘게 실눈을 뜨고 "너도 상 받으면 먼저 책하고 타자기부터 사"라고 말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정거장에서의>
묘한 경쟁심 혹은 반발심에 성씨는 상을 받기도 전에 "상금은 내것이나 다름없다"고 호기를 부리며 술값으로 미리 다 써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고인의 충고를 잊지 않았고 다음해 청계천에서 중고 수동타자기와 문학전집을 산 뒤 상금은 내 것이나 다름없다는 흰소리 따위는 않고 글을 써서 문학상을 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어느덧 20년, 중견 소설가가 된 그는 이제 허허롭게 웃는다. "둘 중에 누가 더 장사를 잘했는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시인의 부고를 들었을 때 부친상중이었던 시인 이문재씨. 죽기 나흘 전 그의 상가를 찾아온 고인은 "형, 상복이 참 잘 어울리네요"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그 난데없는 인사가 자신이 들은 고인의 마지막 육성이었다는 이씨. "그는 늘 나의 아버지와 겹쳐서 떠오른다. 2009년 3월 초순은 혼자서 건너가기가 만만치 않다"며 쓸쓸한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밖에도 1980년대말 문학과지성사 일을 맡고 있던 문학평론가 김병익씨는 그 뜨거운 정치의 계절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가장 활발하게 문학기사를 써냈던 젊은 문학기자로 기형도를 추억한다. 고인의 어떤 시 구절처럼 어쩌면 '추억은 황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월은 그리움을 증폭시킨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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