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 보네거트 지음ㆍ김한영 옮김/문학동네 발행ㆍ352쪽ㆍ1만2,000원
전쟁은 인간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육체적ㆍ정신적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많은 소설들은 그 상처의 본질을 파고들어 가려는 힘겨운 몸짓이기도 하다.
마크 트웨인의 맥을 잇는 미국의 대표적인 풍자작가이자 블랙유머의 대가로 꼽히는 커트 보네거트(1922~2007)의 소설 <마더 나이트> 는 가상의 고백록의 형식을 빌어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전쟁이 남긴 비극적 유산을 직시한다. 마더>
이스라엘 법정의 심판을 자청, 이스라엘의 교도소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주인공 하워드 캠벨 2세는 어떤 인물인가. 독일계 미국인으로 전쟁 전에 잘나가는 극작가였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괴벨스가 이끄는 나치 대중연예선전부에 소속돼 영어권 국가에 나치를 선전하는 작가이자 방송인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미국에 포섭된 정보원이다. 종전 후 전범으로 몰리자 그는 미국으로 탈출해 신분을 감춘 채 10년 넘게 뉴욕의 한 허름한 다락방에서 은신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스파이였던 그의 정체가 다른 스파이에 의해 발각되면서 평온하던 일상은 광풍에 휩쓸린다. 철저한 고독 속에 지내던 캠벨은 우연한 기회에 아래층에 사는 화가 크래프트를 방문하고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는데, 크래프트는 그를 모스크바로 납치해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할 속셈을 가졌던 소련 공작원이었던 것.
전력이 노출된 캠벨을 좇으려는, 혹은 이용하려는 인간군상들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의 백미다. 그들은 가령 이런 자들이다. 유대인과 흑인, 가톨릭에 대한 편견에 가득찬 간행물 '백인기독교민병대'를 발행하는 치과의사 존스, 유대인을 죽이려는 목표를 가진 총기클럽의 지도신부인 술주정뱅이 킬리, 나치즘의 부활을 꿈꾸며 유색인종이 최초로 수소폭탄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는 흑인 운전사 로버트 등등. 쓴웃음을 자아내는 이런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를 통해, 작가는 증오를 불쏘시개로 활활 타오르는 전쟁과 전체주의적 폭력의 광기를 고발한다.
보네거트는 캠벨의 분열된 내면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캠벨은 "독일에서 나에게 명령을 내린 자들은 존스 박사처럼 무식한 미치광이였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오, 하느님 나는 어쨌든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가!"라는 식의 분열증적 고통에 시달린다. 그러나 작가는 결국 자살로 마감하는 캠벨의 고통이 기실 인간의 내성(內省)에 뿌리박고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언뜻 보기에 캠벨은 전쟁기간 동안 '전체주의 선전'이라는 악행을 저지른 자이지만 그는 "누군가가 내 거짓말을 믿을 때 그로부터 나올 잔인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으며, 잔인함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나는 신장결석이 소변으로 빠져나올 때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처럼, 거짓말을 할 때면 그것이 거짓말임을 정확히 인식한다"는 인물이다.
즉 작가는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인간의 능력이야말로 전체주의적 사고의 전염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방패임을 캠벨을 통해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45개의 짧은 챕터로 연결된 속도감있는 플롯, 무심한 듯하지만 삶의 비의를 꿰뚫고 있는 감각적인 대사, 절묘한 반전 등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살아 생전 인간의 양심과 휴머니즘을 옹호했고, 히틀러와 조지 부시를 맹비난했으며, 순정한 사회주의자를 자청했던 커트 보네거트. "순수한 악을 물리치겠다고 전쟁을 일삼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꼴이 된다. 싸움을 벌일 이유는 많다. 하지만 적을 무조적 증오하고,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자기와 함께 적을 증오한다고 상상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악이 어디 있는 줄 아는가? 그건 적을 무조건 증오하고, 신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신과 함께 적을 증오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고 그가 소설 주인공 캠벨의 입을 빌어 외치는 목소리는 글로벌 경제위기로 전체주의의 망령이 아른거리는 21세기 현실에 대한 따끔한 경고로도 들린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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