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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시부모님 등 치매 병수발하신 친정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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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시부모님 등 치매 병수발하신 친정엄마

입력
2009.03.09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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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정엘 갔습니다. 설거지를 한 뒤 커피를 타서 들고 나갔습니다. "엄마 아부지, 커피 드세요" 하니 엄마가 "오메, 우리 것도 탔냐? 느그 아부지하고 나는 따로 마실 것이 있는디"라고 하셨습니다. 듣고 계시던 아버지는 "이리 주라. 나는 커피 마실란다. 요새는 치자차만 하루에 두 잔씩 꼬박꼬박 먹인다"하시며 커피를 달게 마시셨습니다.

엄마는 치자차를 타오셨습니다. 투명한 유리잔에 우러난 노란 차는 보기에 너무 예뻤습니다. "어머나, 치자가 이렇게 이쁜 줄 몰랐네"하며 한 모금 마셔보았더니 아무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보기만 이쁘지 맛은 하나도 없는데 이걸 왜 마셔?"하고 물으니 아버지가 퉁명스럽게 "그러게 말이다. 맛있는 커피나 타주면 좋을 건디 요새는 뭣이 몸에 좋다는 말만 들으면 한사코 먹일라고 해싼다"하셨습니다.

엄마는 "내가 테레비에서 봤는디 이 치자차가 치매예방에 좋다고 하드라. 그래서 마당에 있던 치자를 따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날마다 느그 아부지하고 두잔씩 마신다. 치매 안 걸린다는데 못 허것냐?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또 아냐? 참말로 치매 안 걸릴란지"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올해 두분 다 일흔 둘이십니다. 혹시나 치매에 걸릴까봐 노력을 하시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엄마, 아부지는 치매 안 걸려. 그런 걱정 말고 좋아하시는 커피 실컷 드세요. 커피도 심장에 좋대"했더니 엄마는 고개를 흔드시면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병이 치매다. 느그는 모른다. 치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내가 겪어봐서 안다"하시며 한숨을 내 쉬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가슴이 미어짐을 느꼈습니다.

엄마는 차례대로 정신줄을 놓으신 두분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모두 세 분의 병수발을 13년 동안이나 하셨습니다. 노환으로 시작해서 치매 초기로 접어들고 나중에는 아무도 못 알아 보는 상태가 될 때까지 엄마는 묵묵히 45kg의 체중으로 70kg에 육박하시는 분들의 간호를 혼자서 해내셨습니다. 아들이 5형제나 됐지만 큰며느리라는 굴레 속에서 엄마는 혼자 모든걸 몸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체구는 작았지만 정신력은 누구 못지않게 강하셨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웃는 얼굴로 아기 같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엄마, 친구, 딸 역할을 쉴새 없이 해내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맏며느리라고 칭찬했지만 어린 저희는 그 말이 너무나 듣기 싫었습니다. 엄마는 그 때문에 정작 당신 자식들 입학식 졸업식에 한번도 오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분 모두 편안하게 보내드린 마지막 날 그때야 엄마는 설움에 복받치셨는지 한없는 울음을 터트리셨습니다. 그리고 며칠동안 앓아 누우셨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신이 너무나 허약해졌던 때문이지요. 군에서는 '효부상'을 주었습니다. 그 뒤로 엄마는 자신과 아버지 건강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자식들에게 절대로 물려 줘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엄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한테도 속마음 한번도 털어 놓지 못하고 삭히면서 세분 병수발을 끝내고 거울을 보니 어느덧 내 머리에도 흰 눈이 수북이 쌓였드라. 내가 겪어봐서 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일인지, 그리고 끝이 없는 일이란 것도…. 나는 절대로 자식들한테 추한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모두 할 꺼다."

"그래, 엄마 노력하시면 좋지. 좋은 거 있다고 하면 나한테 말해. 최대한 구해 드릴 테니까. 그런데 엄마 너무 치매 걱정하고 살면 그 스트레스로 더 나빠질 수 있으니까 그냥 하루하루 즐기시면서 아부지하고 알콩달콩 사세요. 그리고 엄마 아부지 연세에는 잡수고 싶으신 게 최고의 보약이야. 간간이 좋아하시는 커피도 드세요" 제 말에 엄마는 "그런다. 먹고잡은 것은 느그 아부지하고 장날에 나가서 사먹고 온다. 어저께도 느그 아부지하고 순대국 사먹고 왔다. 얼매나 맛있던지 저녁때까지 배부르더라"하시며 활짝 웃으셨습니다.

"젊어서는 시부모 눈치 보느라, 중년에는 시부모님 병수발 하느라 외출한번 못했는데 이제 늙어서는 느그 아부지하고 맘놓고 외출도 하고 계에서 여행도 간다. 사람은 늦복이 있어야 한다는디 나는 늙으막에 참말로 호강하고 산다. 자식들 다 건강하게 짝 찾아서 잘살고 있고 느그 아부지가 젊어서 못해준 거 다 해준다. 아침에 늦잠자면 밥도 해놓고, 밭 매고 있으면 시원한 커피도 타와서 같이 마신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젊어서 못해보신 신혼놀이를 70대에 하시는 중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밤이 깊었습니다. 이불을 펴려는데 엄마 아부지가 마주보고 앉으셔서 "숙제 하고 잡시다" 하시더군요. 그러더니 큰 딸네부터 막내네 식구 이름까지 4남매의 자식과 손주들까지 16명 이름을 모두 입을 맞춰 외우셨습니다. 그리곤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하시더니 각자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엄마와 나란히 누워서 "엄마, 치매가 그렇게 겁나?" 했더니 "우린 겁날 것이 없는디 자식들에게 고통 줄까 봐 그런다. 그 일이 몸으로만 되는 일도 아니고 못한다는 자식한테 원망할 일도 아니란다. 나도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TV를 보실 때도 오락프로보다는 자막의 글을 읽어야 하는 외화를 많이 보십니다. 책이나 신문은 글자가 작아 돋보기를 써도 눈이 아프고 머리도 아프지만 TV자막은 안경 안 쓰고도 볼 수 있어서 책 대신 읽는다고 하셨습니다. "늙으면 머리 쓸 일이 많이 없어지는디 영화보면 내용도 이해해야 하고 자막도 봐야 하니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한다." 이 정도의 노력이면 저희 부모님 끄떡 없으시겠죠? 엄마 아부지, 부디 지금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경기 부천 - 이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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