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목요일. 아침에 P가 찾아왔다. <나무> 의 해적판을 찍어 뿌린 장본인이다… P는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경위서를 써놓고 갔다. 그는 덤핑 업자에게 <나무> 를 2,800원에 넘기고, 덤핑 업자는 소매상에 3,500원에 판매를 한 모양이다.'(250쪽) 나무> 나무>
홍지웅(55) 열린책들 대표가 2004년 한 해의 일기를 묶어 책으로 냈다. 제목은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 . 848쪽, 원고지로 5,000매가 넘는 분량이다. 365일 중에서 단 3일만 빠졌으니 매일같이 거의 원고지 14매 분량의 일기를 쓴 셈이다. 켜켜이 쌓인 이 책쟁이의 일상을 들추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 출판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엿보게 된다. 통의동에서>
"아들과의 약속으로 시작한 일이에요. 2003년 7,000매짜리 앤디 워홀의 <일기> 를 같이 번역하기로 했는데, 결국 아들 혼자서 마무리지었죠. 대신 아들에게 '앤디 워홀처럼 1년 동안 일기를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출판동네의 깊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됐더군요. 출판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괜찮은 소개서가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일기>
이 책에 실린 일기를 쓴 2004년은 홍 대표가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직을 겸하고 있던 때다. 작가ㆍ편집자ㆍ업계 인사와의 시시콜콜한 대화부터, 밥 먹고 술 마시고 골프 친 이야기, 밀고 당기는 협상 등이 가족과의 사적인 이야기들과 버무려져 책의 페이지를 채운다. 글을 읽고 사색에 잠긴 출판인의 정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드레진 출판개론서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출판계의 생리가 날것으로 드러난다.
"출판도 문화의 한 장르입니다. 건축, 그림, 음악과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낀 것, 미래에 대한 비전이 책이라는 장르로 표현되는 거예요. 문화의 양태를 열람 가능한 기록 형태로 만드는 것이죠. 책꽂이에 꽂혀 있다가도 어떤 사람 손에 들려지면 유기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사실 굉장히 동적인 장르입니다."
홍 대표는 이 책에서 많은 이름을 이니셜로 처리하고 '자신이 언급된다는 사실 자체에 당혹감을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는 통째로 덜어내 버렸다. "그저 출판동네, 출판인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을 뿐,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만으로도 2004년 한국 문화계의 지형도를 그리는 데 별 부족함이 없다. 그는 요즘도 매일 일기를 쓴다.
"이 책을 통해, 여러 선후배 출판인들에게 지난 세월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라고요."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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