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흩날린 5일 오후 서울 중구보건소 앞.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 한 대가 미끄러지듯 빠져 나왔다. 장애인 치매노인 등 거동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대형욕조와 온수, 각종 목욕장비를 싣고 다니는 '이동목욕' 봉사 차량이다.
운전대를 잡은 중구보건소 재활보건팀의 김후봉(57ㆍ9급)씨는 소풍이라도 가듯 연방 싱글벙글했다. 김씨와 함께 이동목욕을 담당하고 있는 김희봉(54ㆍ9급)씨, 복지 도우미로 나선 50대 여성 2명도 웃는 낯이다.
20여분 뒤 신당2동의 비탈진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든 차량이 이날의 첫 '손님' 지성연(54)씨 집 앞에 도착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지씨와의 만남은 벌써 7년째다. 두 김씨는 욕조를 거실로 옮긴 뒤 호스를 연결해 차 안 수조에 담긴 온수를 뽑아 올렸고, 도우미들도 비누와 샴푸, 때 수건 등을 꼼꼼히 챙겨 걸음을 재촉했다.
"인사도 안 해? 이제는 안 반갑다는 거지, 뭐." 2주에 한 번 오는 이들을 꽤나 기다린 눈치인데, 지씨는 농담 섞인 시비부터 건다. 후봉씨도 친구 대하듯 반말로 받는다. "그새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네. 우선 이발부터 해. 깨끗이 씻겨줄게. 좋지?"
군대 시절, 이발병이었던 후봉씨의 솜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욕조에 몸을 담근 지씨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몸을 구석구석 꼼꼼히 닦아주는 후봉씨의 손길에서는 몸 불편한 이들의 고통까지 씻어 주고픈 마음이 묻어났다.
"고마움을 왜 모르겠습니까. 사실 가족도 하기 힘들어 하는 일 아닙니까." 말로는 잘 표현하지 못하는 지씨지만 이들이 다녀간 날 저녁이면 자연스럽지 못한 손가락을 꾹꾹 눌러 휴대폰으로 '고맙다'라는 문자메시지를 잊지 않고 보낸다.
다음은 인근 김학순(93) 할머니 댁. 3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가파르고 좁아 욕조 옮기기도 만만찮다. 할머니 목욕은 도우미들 몫이다. 손자 안준석(33)씨는 "목욕 한 날에는 할머니가 모처럼 단잠을 주무신다"며 고마워 했다.
2시간여의 목욕봉사를 마친 뒤 온 몸은 땀과 물만이 아니라 뿌듯함과 보람으로도 흠뻑 젖어있다. "목욕봉사 하다 보면 중풍으로 쓰러져 7,8년 누워계시다 20여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잘 돌봐 드리지 못해 두고두고 가슴 아파요. 어르신들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들이 목욕차량이 지나가면 차를 세우고 '고맙다'는 말을 건넬 때 보람을 느낍니다."
후봉씨는 1998년부터 11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다. 한 번은 다른 곳에 발령이 났는데 누구 하나 이 일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어 3개월 만에 복귀했다. 그동안 등을 밀어준 이만 1만명, 머리를 다듬어 준 이도 2,400명이나 된다. 울고 웃은 사연도 많다.
최고령 '손님' 김모(106) 할머니는 작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긴 머리가 예쁘다'고 하셨대요.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막 우시더군요." 목욕을 한 뒤 편안히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독거노인도 40여명을 헤아린다.
후봉씨는 지난해 말 서울시에서 받은 '선행실천감동상' 상금 50만원도 장애인회관에 20만원, 목욕으로 맺어진 3명에게 10만원씩 전달했다. "저도 사람인데 가끔 짜증도 나죠. 그래도 어떡합니까. 누군가는 해야 될 일이잖아요." 후봉씨의 말에 재활보건팀 김혜선 주임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내년 6월이면 정년이신데, 그 뒤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에요."
김종한 기자 tellm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