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부터 서울 강남구의 한 제조업체 경리로 일하던 재중 동포 권모(33ㆍ여)씨는 지난 달 20일 직장을 잃었다. 하지만 함께 해고된 한국인 동료 8명과는 달리 권씨는 실업 급여를 받지 못했다.
알고 보니 회사는 1년간 보험료 명목으로 다달이 권씨 월급에서 1만여 원씩을 공제했지만, 실제 고용보험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외국인 신분인 권씨에게 해당되지 않는 내국인용 신청서류를 제출, 고용보험에 가입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권씨는 "월급명세서에 찍힌 대로 당연히 가입돼 있는 줄만 알았다"며 1년 동안 다른 직원 못 지 않게 일했는데 한국 국적이 아닌 나만 실업급여를 못 받는다니 정말 억울하다"고 했다.
태국 출신의 외국인 근로자인 라몬(36ㆍ여)씨도 지난 1월에 3년 가까이 일하던 경남 김해의 한 제조업체에서 해고됐지만 실업 급여를 받지 못했다.
다달이 월급 122만여원 중 7,000여원이 고용보험료로 월급명세서에 찍혀 나갔지만 고용주가 실제로는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외국인노동자 상담소를 찾고야 실업 급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고용보험에 어두웠던 점을 고용주가 악용해 돈만 챙긴 것이다.
경기불황에 해고 1순위로 내몰린 외국인 근로자들이 악덕 기업주의 횡포와 정부의 무관심으로 실업급여의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정부가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보험 적용을 의무가입에서 임의가입으로 완화한 것을 악용, 일부 기업주들이 월급에서 보험금을 공제하고도 실제로는 보험금을 내지 않은 사례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가 최근 실직한 외국인 근로자 37명 가운데 14명의 월급 명세서를 점검한 결과, 매달 회사가 보험료 명목으로 일정액을 원천 징수하고도 고용보험에는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김형민 상담실장은 "조사 대상 근로자가 일부인 것을 감안하면 실제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외국인 근로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며 "당국이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인 근로자들도 고용보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보험료를 다달이 납부하고도 고용주의 '꼼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뒤늦게 속은 것을 알아내도 실직 후 2개월 내에 취업을 해야 '불법체류자'를 피할 수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박선희 국장은 "실업급여 200만~300만원을 찾기 위해 민사 소송을 낸다 해도 배보다 배꼽이 큰 싸움이다.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법적 대응 대신 새 직장을 찾는데 몰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부 악덕 고용주가 노리는 것은 고용보험 뿐만 아니다. 사업주 부담인 귀국비용보험이나 출국만기보험도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 신은하 국장은 "출국날짜가 임박해서야 속은 걸 알게 돼 결국 분노만 삼킨 채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전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고용보험 중 사업주 전액 부담인 직업능력개발, 고용안정 항목은 강제가입으로 재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한글로만 되어 있는 보험 취득자격통지도 15개국어로 번역 중"이라고 밝혔다.
장재용 기자 jy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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