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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100여개 마을 800리 이을 지리산 길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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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100여개 마을 800리 이을 지리산 길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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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6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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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걸음은 행복하신가요?

출퇴근, 등하굣길, 시장에 가고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우린 걸음을 걷습니다. 짧은 시간에 더 멀리 움직이려는 욕망에 수많은 탈것이 생겨나면서 걷는 수고를 많이 덜어주었습니다.

덕분에 몸은 편해졌지만 무엇인가 빈 듯한 허전함이 밀려옵니다.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이래 DNA에 깊이 새겨 놓은 걷는 즐거움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느림의 미학' 걸음은 세상을 찬찬히 느끼면서 자신의 마음 속으로 여행을 하는 방법입니다. 최근 걷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자동차에 길을 다 내주다 보니 막상 걸을 만한 길이 부족해 걷기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일부러 걷기 위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뉴질랜드의 밀포드 트랙을 찾아 떠나는 이들도 많답니다.

최근 오로지 걸음을 위한 길을 내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지리산 둘레 800리(300km)를 걷는 지리산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지리산권 시민단체인 지리산생명연대 부설 사단법인 숲길이 산림청의 지원을 받아 조성 중인, 전북 남원, 경남 함양 산청 하동, 전남 구례 등 3개도 5개 시ㆍ군의 100여 마을을 잇는 정겨운 길입니다.

이 길은 지리산이 잇단 도로 개설 등 환경 훼손으로 신음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고안됐다고 합니다. 산을 파고들어갈 게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 지리산을 만끽할 것을 제안하는 길입니다.

지리산길은 그 길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열정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남원시 산내면만 해도 대안의 삶을 꿈꾸며 귀농한 이들이 꽤 됩니다. 면 전체 인구가 2,000여명인데 귀농 인구가 200여명으로 10%가량을 차지합니다. 지리산길의 철학적 공감대를 나눌 수 있는 인력 풀이 준비돼 있던 거죠.

'숲길'은 2007년 문을 열고 곧장 코스를 만들어갔습니다. 지난해 4월 시범구간으로 20km를 처음 개통했고, 9월 9km가량을 더 이어서 일반에 개방했습니다. 올해 4월이면 지난 가을과 겨울 부지런히 다지고 펴낸 길 40여km가 추가돼 지리산길은 70km 가까이 길어집니다.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산을 빙 두르는 길이니 숨을 헐떡이는 고생은 필요 없습니다. 느긋하고 편안하게 사색에 빠져들며, 지리산 영봉을 바라보며 그곳에 움을 틔운 마을의 사람 사는 모습을 관조하는 길입니다.

이제 1년이 되어가는 지리산길은 가족끼리 찾는 사람이 가장 많고, 다음은 혼자 오는 30, 40대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혼자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 이곳까지 내려온다네요.

푹신한 숲길이 30% 정도인 지리산길은 둑길을 지나고, 시멘트 포장된 농로도 지나며 마을과 마을을 잇습니다. 남은 길과 잊혀진 길을 잇는 지리산길 조성 작업은 걸음의 속도만큼이나 더디게 진행됐습니다.

가능하면 주민들 피해가 없도록 마을을 둘러가게 코스를 만들어야 했고, 마을 주민들에게 지리산길 사업의 취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번 설명회를 열어야 했습니다. 주요 통로의 땅을 가진 지주들을 설득하는 데도 많은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일단 코스가 그려지고 나면, 숲길 등 걷기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때 사용되는 도구는 곡괭이와 삽, 지게뿐이었습니다.

숲길의 박한강 조사정비팀장은 "가능하면 중장비를 쓰지 않았다"며 "도덕적 결벽증이 아니라 손길로 직접 다듬어야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작업에 나선 일꾼들은 주변 마을 50, 6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지게를 질 줄 몰랐기 때문이죠.

지리산실은 개방 1년도 안 돼 이미 수만명이 찾았고, 재차 방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수에서 왔다는 한 가족은 벌써 세 번째 지리산길 안내센터의 문을 두드렸다고 인사하더군요. 지난 겨울방학 때 두 번 왔다가 눈보라와 비바람에 포기했던 길, 기어코 맑은 날을 기다려 다시 지리산길에 성큼 발을 내딛었습니다.

한 번 이 길에 매료된 이들은 다음엔 친구를 꾀어 여러 번 찾아오기 일쑤입니다. 올 4월 열린다는 새 구간에 대해 벌써부터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박 팀장은 "제주란 이름이 제주올레를 떠받치듯 지리산이란 묵직한 상징과 로망 때문에 탐방객들이 부족한 게 많은 지리산길을 애정어린 눈으로 봐주는 것 같다"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는 처음 길을 만들면서 이렇게 애를 쏟았는데 혹시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나중엔 아무도 오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만들고 보니 너무나 아름다워 나만을 위한 길로 남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하네요.

남원·함양=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제주 올레 등 걷는길 만들기 붐

요즘 걷는 길, 이른바 '트레일(trail)' 만들기가 붐이다.

우리나라에도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일본의 자연보도에 버금가는 행복한 걷는 길을 조성하자는 시도가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리산길과 함께 가장 활발하고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제주올레다. 제주 출신 언론인이었던 서명숙씨가 2006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온 뒤 구상한 트레일이다.

2007년 서귀포 시흥초등학교에서 종달리를 거쳐 성산 광치기 해안까지 15km 1코스를 선보인 이후 제주 섬을 반 바퀴 휘감는 11개 코스를 만들었다.

제주올레는 이달 28일 제주시 지역에선 처음 뚫리는 12번째 코스(제주자연생태문화체험골-신도연못-수월봉-용수포구)를 추가 개방한다. '소음과 자동차로부터 자유로운, 걸음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색의 길'로 꾸며진 올레길은 제주가 이제껏 숨겨온 속살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www.jejuolle.org

지리산길 조성에 큰 힘을 실어준 산림청은 2016년까지 전국에 1,500km에 달하는 산림체험 숲길을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대전 청주 보은 등 대청호 주변에 100km 길이의 호반 숲길을, 서산 홍성 예산엔 내포문화 숲길을 놓는 식이다. 먼저 문을 여는 길은 올 가을에 개방될 울진 소광리 금강송 숲길이다.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옛 보부상길을 따라 소광리까지 이어지는 21km 구간이다. 금강송 숲길은 앞으로 전곡리까지 이어지는 2코스가 연장되고, 이후 통고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왕피천 가는 길목의 박달재까지 총 70km로 완성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도 길 닦기에 팔을 걷어부쳤다. 주제는 원효 트레일이다. 신라 고승 원효가 당으로 유학 갔다 돌아온 길을 따라 걸으며 템플스테이 등을 체험하는 코스다.

경산-문경-여주-수원-구미-경주를 잇는 697km 길이. 세계의 순례 코스와 연결하는 네트워크도 구축해 국제적인 명소로 키울 계획이다. 환경부도 전국 단위의 국토생태 탐방로를 꾸미겠다고 나서고 있다.

전남 영암군이 조성 중인 월출산 기(氣)도로도 걷기를 위한 길이다. 월출산을 빙 두르는 총 100리 길 중 왕인박사 유적지 일대 7km가량이 개통돼 있다.

이성원기자

■ 서울 성곽길, 도심산책의 즐거운 재발견

서울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걷기 좋은 길이 많다. 장충동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인근에서 시작되는 성곽길이 대표적이다. 1시간 가량 가벼운 마음으로 상쾌하게 산책할 수 있다. '걷기 선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름난 곳이지만 아직은 한적한 느낌이 강하다. 가볍게 운동도 하며 쉬엄쉬엄 봄을 완상하고 싶은 상춘객들에게 특히 제격이다.

동대입구역을 나서자마자 차량 경적 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매케한 매연을 실은 바람이 코를 급습하고 달아났다. 장충체육관과 신라호텔 등을 인근에 둔, 대도시 서울의 주요 도심 중 하나인 이곳. 과연 주변에 걷기 좋은 길이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쉬 가시지 않았다.

성마른 의심은 금세 사라졌다. 동대입구역 5번 출입구에서 장충체육관 방향으로 150m 가량을 걷자 오른편으로 높이 7m가량의 거대한 담이 보였다. 서울성곽이었다. 성곽 밑으로는 널찍하고 판판한 돌들이 만들어낸 투박한 산책로가 열려있었다. 첫눈에 발이 끌렸다.

서울성곽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축성했다. 세종 4년(1422년)과 숙종 30년(1704년)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을 형성했다. 어느 지점은 태조 때 쌓은 작은 돌들이 서로의 몸을 맞대 키를 키우고 있었고, 또 어느 지점은 폭 1m 가량의 큼직한 돌들이 벽을 만들었다. 조선 전기와 중기의 축성술이 서로 어울려 모자이크 벽을 만들며 역사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8분 정도 성곽을 따라 걷자 잠시 쉬어가라는 듯 돌벤치 16개가 제각각의 모양으로 앉아있었다. 벤치에 앉자 차량 엔진, 경적 소리는 잦아들고 새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성곽을 따라서 이어진, 차량 두 대가 겨우 오갈 만한 동네길도 서울 번화가의 요란스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색 바랜 빨간 벽돌의 키 작은 양옥집들이 잇달아 눈에 잡혔고, 널찍한 평상이 놓인 동네 구멍가게가 편의점을 대신하고 있었다.

남산의 풍광을 유지하기 위한 건물 고도제한이 연출한 보기 드문 풍경. 시간 속으로 사라진 여러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성곽길을 따라 걸은 지 13분이 지나자 '스테퍼'(Stepper) 등 간단한 운동시설이 눈앞에 나타났다. 600여년을 견뎌온 성곽길이 서울시민의 일상까지 단단히 끌어안고 있음이 보였다.

산책에 나선지 30분. 어느덧 성곽의 막바지까지 올랐다. 서울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높은 곳이었지만 평지나 다름없는 완만한 경사의 길을 죽 걸어와서 그럴까, 숨이 가쁘지 않다. 성곽이 유실된 자리엔 최근 지어진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팔각정에 오르자 서울시내가 발 밑에 놓여있었다. 남산타워의 조망에 비길 수는 없지만, 가슴이 트였다.

팔각정에서 내려와 성곽 안쪽 길로 접어들었다. 하산길이다. 흙색 시멘트로 장식된, 인공적인 산책길이 발에 설었지만 상쾌한 공기가 위안을 주었다. 산책길의 끝은 남산자유센터 웨딩홀과 맞닿아 있었다.

1시간 가량의 산책을 마치자 머리가 맑아졌다. 목 밑에서 슬쩍 풍기는 땀 냄새에서 삶의 의지가 피어났다.

●도움말 다음 '아름다운 도보여행'(cafe.daum.net/beutifulwalking) 카페지기 손성일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 그곳에 가면 발걸음에 여유가…

걷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전국에 크고 작은 걷기 동호회가 인터넷 카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 카페 '세상 걷기'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 '유유자적' '나를 찾아 떠나는 도보여행'과 '네이버 걷기클럽'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주로 평일 낮이나 퇴근 후 걷기, 주말 걷기를 통해 누구나 부담없이 걸을 만한 좋은 코스들을 찾아내고 함께 걷는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걷기 모임 중 가장 오래 된 '세상걷기'는 2000년에 만들어져 회원이 5,400명쯤 된다. 세상걷기의 카페지기 신경문씨는 "매번 20~40명이 모여 숲길이나 흙길 중심으로 서너 시간 걷는다"고 소개했다.

지역별 걷기 코스 안내서 '길 따라 발길 따라'를 내고 있는 걷기 전문 출판사 황금시간의 윤문기 팀장은 "수도권의 걷기 좋은 숲길로 2시간 이상 코스만 해도 최소 150개가 넘는다"고 말한다. 이 많은 길 중 서울에서 1시간 정도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곳을 소개한다.

◆ 노을공원 메타세콰이어 길

월드컵공원의 네 개 공원 중 하나로 본래 골프장으로 조성됐다가 지난해 11월 공원으로 개방됐다. 너른 잔디밭과 탁 트인 조망이 특징. 한강쪽 외곽을 따라 하늘공원 남쪽에서 노을공원 가는 들목에 근사한 메타세콰이어 길이 숨어 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메타세콰이어가 800m에 걸쳐 양쪽으로 서 있는데, 아는 사람이 드문 멋진 길이다.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서 접근.

◆ 몽촌토성 산책로

한성 백제의 유적인 몽촌토성은 잔디가 파릇할 때 걸으면 목장이나 경주 왕릉이 연상되는 곳이다. 해자를 끼고 도는 '호수의 길', 외곽으로 크게 한 바퀴 도는 '젊음의 길', 안쪽의 토성 위 흙길을 걷는 '토성의 길', 호젓한 데이트 코스 '연인의 길' 이 있는데, 각각 20~40분 걸린다. 코스에 상관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도 좋다.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또는 5호선 올림픽공원역에서 접근.

◆ 서리풀공원

서초구의 명품 숲길이다. 야트막한 야산에 산책로를 꾸몄는데, 한여름에는 울창한 숲이 터널을 이뤄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 강남성모병원 맞은편 국립중앙도서관 입구의 몽마르트공원을 거쳐 찻길 건너 직진하면 서리풀공원으로 들어선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 끝에 효령대군의 묘를 모신 청권사가 있다. 청권사는 평일 무료 개방한다. 청권사에서 70m만 더 가면 지하철 방배역이다.

◆ 배봉산 근린공원

동대문구의 유일한 산지 공원으로, 위생병원의 콘크리트 담장을 헐어내고 가꾼 산책로가 능선과 중턱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해발 100m가 겨우 넘지만 조망이 훌륭하다. 위생병원 정문으로 들어가 본관 못 미쳐 오른쪽 쉼터에서 나무계단으로 올라간다. 배봉산근린공원은 중랑천 둑길과 육교로 이어져 있어 길게 걷기에도 좋다. 지하철 1호선 회기역이나 위생병원 버스정류장에서 접근.

◆ 종묘에서 창경궁까지

종묘와 창경궁은 육교로 이어져 있어 한 번에 걷기 좋다. 조선 역대 왕의 신위를 모신 종묘는 정전의 장중한 건축미와 조용한 숲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곳. 종묘 정문으로 들어가서 정전과 영녕전을 차례로 지나면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육교가 나온다. 창경궁을 한 바퀴 돌아 홍화문으로 나온다. 화요일은 쉬므로 입장할 수 없다. 지하철 종로3가역 또는 창경궁 버스정류장에서 접근.

■ '걷는 맛' 일품 지리산길 3곳

지리산길의 첫 구간은 남원시 산내면의 매동마을에서 시작된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무성하게 우거진 대숲이 인상적이다.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오르면 울창한 솔숲이 나들이객을 반긴다. 타박타박 포장길을 지나면 땅바닥에 떨어진 솔잎이 아침 볕에 반짝이는 오솔길로 이어진다.

새 소리와 함께 숲을 벗어나면 중황마을. 이곳 중황과 바로 옆 상황마을엔 다랑이논이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있다. 남해 다랭이마을보다 경사는 완만하지만 석축의 굵직한 돌덩이와 제각각으로 휘어진 논두렁이 이뤄낸 곡선의 조화가 황홀하다.

남원시 산내면에서 가장 평평한 곳은 실상사가 있는 실상들이다. 하지만 실제 논 밭으로 보면 상황 중황의 들이 더 넓다고 한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산 속의 거대한 평야다.

상황마을을 지나 길은 다시 숲으로 안내한다. 고개를 넘으면 경남 함양군의 창원마을. 호남과 영남을 잇는 고갯길이다. 예전 신작로가 함양군 마천까지 뚫리기 전에 창원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와 상황 중황마을을 거쳐 인월장을 보러 다녔다. 고개를 넘어 서로 혼사가 오가기도 했다.

사단법인 '숲길' 관계자는 지리산길을 내고 난 뒤 고개를 넘어 시집왔던 할머니 네 분을 모시고 고갯길에 올랐다고 한다. 고개 꼭대기에 선 할머니들은 30년 만에 와본다며 옛기억에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한다. 그분들의 아리따웠던 과거가 묻어 있는 고갯길이다.

등고재로 넘어가 만난 창원마을도 다랑이논이 아름답다. 논 사이로 굽이굽이 휘어진 길은 마을 입구 당산나무 쉼터에서 잠시 멈춘다. 다랑논과 어우러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며 긴 호흡의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창원마을에서 1구간 종착지인 금계마을까지는 다시 숲길이다. 창원마을로 포장길이 뚫리기 전에 사용하던 옛길이다. 숲길 입구는 까만 바위들이 강처럼 군락을 이룬 너덜지대다. 숲은 빼곡한 소나무들로 짙다. 숲을 빠져 나와 금계마을에 다다르기 직전, 엄천강과 건너편 의탄리의 다랑이논 자락이 이루는 조화에 시선을 빼앗긴다.

매동마을서 시작해 금계마을까지, 1구간의 거리는 10km 가량. 다랑이논을 유독 많이 지난다 해서 '다랑이논 길'이란 이름을 갖고있다.

2구간의 '산사람길'은 금계마을에서 의탄교를 건너 맞은편 의중마을에서 출발한다. 산사람은 지리산 주민들이 예전 빨치산을 부르던 이름. 이 코스는 지리산의 아픈 상처, 빨치산의 흔적을 더듬는다.

의중마을은 의평마을과 붙어 있다. 지리산길 이정표는 의중마을에서 벽송사로 오르는 옛 절길로 안내한다. 의중마을의 고즈넉한 절길에 접어들기 직전 잠시 의평마을로의 탈선을 권한다. 마을 옆, 커다란 바위와 억새가 조화를 이룬 작은 계곡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맑은 계곡에서 방망이를 두드려 빨래를 하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의중마을에서 오르막길로 한참을 걸어 만나는 벽송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벽송사 능선길에 접어들어 처음 만나는 송대마을은 빨치산의 마지막 은거지로 알려져 있다.

송대마을부터는 계속 내리막이다. 엄천강의 수려한 풍경을 감상하며 터덕터덕 산길을 내려오면 어느새 2구간 종점인 세동마을에 도착한다.

지리산길 안내센터는 남원시 인월면사무소 소재지인 인월리에 있다. 시범구간(1,2구간)을 개통한 직후 많은 이들이 지리산길 시작을 위해 산내면의 매동마을로 바로 가서 비좁은 마을 마당에 차를 세워 놓는 바람에 마을 주민들이 꽤 많은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숲길'은 부랴부랴 인월리와 매동마을을 잇는 걷기 코스를 만들어 지난해 9월 개방했다. 세 번째로 개방된 이 구간이 안내센터에서 시작되는 실제 지리산길의 첫머리가 되자 이용객들은 이 구간에 '0코스'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안내센터 건너편 둑길을 따라 길은 시작된다. 중군마을을 지나 엄천강의 기묘한 풍경을 내다보며 능선을 타던 길은 백련사 입구에서 숲길로 접어들어 장항마을로 내려선다.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숲길을 벗어나자마자 만나는 장항마을 당산나무다.

우람한 둥치의 소나무 한 그루가 무거운 가지를 늘어뜨린 모습이 신령스럽다. 나무 밑엔 새끼줄로 금줄을 쳐 놓았다. 지금도 주민들은 때마다 이 나무 아래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소나무가 응시하는 지리산 자락. 가운데 우뚝 선 천황봉 꼭대기는 여전히 흰 눈을 덮고 있다.

■ 여행수첩/ 지리산길

● 지리산길은 5개년 계획으로 2011년 전체가 완성될 계획이다. 등산로가 아닌 예전 생활로를 잇는 길이기에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나 여성들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한 구간의 거리는 10km 정도로 걷는 데 서너 시간 걸린다.

지리산길 일부엔 사유지와 농로가 포함돼 있어 주민들에 피해를 주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 길이 갈라지는 지점마다 작은 장승 형태의 나무 이정표나 스테인레스로 된 이정표가 설치돼 있다.

● 지리산길 출발에 앞서 전북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에 있는 지리산길 안내센터에 들르면 지도 등 다양한 자료도 챙기고, 근무자로부터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안내센터 앞에 주차할 공간이 마련돼 있다. www.trail.or.kr (063)635-0850

남원·함양=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길에서 띄우는 편지/ 지리산길을 따라서

지리산길을 따라 고개를 넘고 숲길을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매동마을에서 시작된 고개를 넘어와 제법 목이 칼칼해질 무렵, 중황마을로 내려서는 초입에서 간이 휴게소를 만났습니다. 다랑이논 한 귀퉁이에 의자 몇 개 가져다 놓고 평상을 깔아놓은 간이 판매대입니다. 쑥스러운 미소로 맞는 할머니께 마을 이야기나 좀 듣고자 커피 한 잔을 청했습니다.

논이 참 예쁘다고 건넨 말에 할머니는 "저 위쪽에도 논들이 있었는데 한 2년 쉬니 금세 숲이 되부러. 숲이 시나브로 내려오더라구" 하십니다.

가야 할 길이 멀어서 일어나 값을 치르려니 그냥 가라십니다. "뭐 많이 시켰어야 돈을 받지 달랑 커피 한 잔 값을 어떻게 받느냐"는 할머니는 소쿠리에 있던 호두 한 움큼을 주머니에 넣어주시기까지 하네요.

할머니와 멀찍한 테이블에 돈을 접어 올려 놓고 "다음엔 막걸리와 파전을 푸짐하게 사드릴게요" 하고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냥 가라니까"는 할머니 목소리가 어찌 그리도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놓던지요. 봄볕에 댈 게 아니었습니다.

상황마을을 지나 등구재를 넘자 지리산길 탐방객을 상대로 한 또 다른 가게가 보였습니다. 원두막 같은 건물의 허름한 좌판입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엔 큰 고무대야 안에 맥주와 음료수 등이 물에 가득 차있었고, 알아서 커피를 타 먹을 수 있도록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전자, 봉지 커피 등이 준비돼 있었습니다.

기둥에 박혀 있는 메뉴판엔 가격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네요. '잡수시고 돈은 여기에.' 탐방객을 믿고 파는 무인 좌판입니다. 정겨운 풍경 속의 지리산길에서 지리산만큼이나 후덕한 인심과 믿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지리산길을 찾는 이들이 늘면서 마을 입구엔 이러한 작은 가게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습니다. 무인 가게 평상에 앉아 땀이 식어갈 무렵 나중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곳에도 여느 관광지 같은 풍경이 재연되는 건 아닐까 하고요. 가짜 꿀이 토종 꿀로 둔갑하고, 수입농산물이 방금 산과 밭에서 캐온 양 좌판에 올려지지나 않을지. 돈 몇 푼 때문에 동네분들끼리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제 걱정이 제발 기우에 지나지 않기를 굽어 살펴달라고 지리산 산신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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