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빅뱅도 <가요무대> 에 나올 것이다. 중년의 탑이 한층 낮고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랩을 하고, 태양과 승리는 두꺼워진 허리로도 유연하게 춤을 출 것이다. 대성의 트로트 본색은 제 물을 만난 격이고, 지 드래곤은 머리가 살짝 벗겨졌어도 여전히 귀여울 것이다. 그들의 공연장에서 실신까지 하면서 열광했던 소녀들도 원숙한 중년의 여인이 되어 남편과 아이들이 잠든 밤, 한때 자신들의 청춘을 빛나게 했던 우상들을 보면서 눈물지을 것이다. 가요무대>
음악을 만들지 않는 옛 스타들
노래는 그런 것이다. 짧은 한 소절로도 듣는 사람을 순식간에 그 노래를 들었던 과거의 시간들로 이동시킨다. 그것은 너무도 생생해서 그때의 햇빛이나 바람, 가슴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기억 속에서 복제해 낸다. 인간이 소리의 높낮이와 빠르기 결합이 특정한 정서적 효과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의식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한 이래 음악은 가장 강력하게 추억을 환기시키는 예술이 되었다. <가요무대> 가 수십 년 동안 건재하고, <콘서트 7080> 이라는 프로가 심야의 중년들을 울리고 있는 것도, 미사리 일대의 카페들이 점점 더 늘어가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콘서트> 가요무대>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은 아름다운 현재를 필요로 한다. 지금의 중년들이 7080음악에 열광할 수 있는 것은 그 음악들과 함께 한 빛나는 현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그들의 현재는 어떤 음악과 함께 기억될까? 원더걸스나 빅뱅의 음악일까? 아니면 수십년째 반복되고 있는 7080의 음악으로 그들의 중년도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인가? 어쩌면 음악 소비자로서의 그들의 감수성은 오래 전 그들의 20대에서 멈춰져 화석화돼 있는 건 아닐까?
조용필은 더 이상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 들국화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문세는 라디오 디제이이고, 해바라기는 소식조차 없다. 청춘의 시절에만 음악으로 위로 받아야 할 감수성이 있는 건 아니다. 중년에도 노년에도 과거가 아닌 현재의 음악으로 위로 받아야 할 감정은 있는 것이다. 70이 다 된 믹 재거의 롤링스톤스는 여전히 가장 요란한 신곡을 내고 가장 요란한 공연을 한다. 60이 다 돼가는 스팅의 새 노래는 여전히 성숙하고 섬세하다.
예술 작품은 현재와 날카롭게 맞설 때 생산된다. 현재와 맞설 의지가 있다면 나이와는 상관이 없는 법이다. 소설가나 화가는 70이 돼도 신작을 내놓는다. 우리의 대중가수들은 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다운로드와 컬러링으로 급격히 재편되는 음악시장의 현재 상황에도 부분적 원인은 있을 것이다. 혹여 과거의 화려한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우리와 빛나는 시절을 함께 했던 가수들이 현재의 감수성으로 만들어내는 노래들이다. 한때 빛나던 청춘을 함께 했던 가수들이 느끼는 지금의 인생을 그들의 노래로 알고 싶은 것이다.
지금의 감성과 삶을 들려주길
빅뱅이나 원더걸스처럼 히트하지 않으면 어떤가? 그들이 과거에 이들보다 훨씬 더 위대했었다는 것은 같은 세대면 다 아는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쓸쓸한 것이고, 그 쓸쓸함을 위로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오래된 친구 같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인 것이니 말이다. 연이어 신곡을 발표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해가고 있는 이승철이 반가운 것도, 최근에 홍대 앞 인디 뮤지션들과 자신의 이름으로 밴드를 만든 김창완이 좋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빅뱅은 20년 후쯤에도 자신들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하루하루> 나 <거짓말> 을 <가요무대> 에서 부르고 있는 게 아니고 자신들의 중년을 위해 만든 새로운 노래를 그들과 함께 해온 팬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가요무대> 거짓말> 하루하루>
육상효 인하대 교수 ·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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