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오전 2시15분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의 한 카페. 손님을 가장해 들어간 김모(32), 박모(25ㆍ여) 부부는 혼자 있던 여주인 이모(60)씨에게 흉기를 들이대고 돈을 요구했다.
순간 이씨가 "사람 살려"라며 비명을 지르자 한 행인이 카페로 달려왔다. 지문을 안 남기려 가죽장갑까지 꼈던 '부부 강도'는 너무 어설프게도 출입문 잠그는 걸 깜박한 것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인근 주차장에 숨어있던 이들을 잡고 보니, 아내 박씨는 임신 3개월째였다. 박씨는 "남편이 실직한 뒤 아이를 낳아 키울 형편이 아니어서 낙태수술을 받으려는데 그럴 돈조차 없었다"면서 고개를 떨궜다.
먹고 살기 힘들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강도 행각을 벌이는 이른바 '생계형 범죄'가 갈수록 늘고 있다. 경기침체가 장기화 하면서 벼랑 끝에 몰린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1월 말 김씨가 일당 8만원을 받고 일하던 을지로 가구공장을 그만 둔 뒤 끼니조차 잇기 어렵게 되자 범행을 모의했다.
박씨는 "친정에서 사준 쌀을 아껴 다섯살배기 딸만 겨우 밥을 먹이고 남편과 나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부부는 둘 다 신용불량자로, 지난해 11월부터는 전기와 가스요금도 내지 못했다.
'부부 강도'는 여주인 혼자 있는 카페 등을 골라 범행에 나섰다. 세차례 범행에서 강탈한 금품은 모두 200여만원. 그러나 세번째 범행에서는 땀을 닦기 위해 장갑을 벗었다가 테이블에 지문을 남기고 폐쇄회로(CC)TV에 맨 얼굴을 노출하는 등 실수를 연발하다 네번째 범행에서 덜미를 잡혔다. 서울 서대문 경찰서는 2일 김씨를 특수강도 혐의로 구속하고, 아내 박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1일 배고픔을 참지 못해 서울역 인근 가게에서 사탕, 술 등 1만6,000원어치를 훔친 김모(65)씨를 붙잡았다. 김씨는 경찰에서 "서울역 근처의 하루 숙박비 7,000원짜리 쪽방에 살면서 일용직 노동을 해왔는데 최근 일감이 없어 굶는 날이 많았다"고 진술했다.
광주 북부경찰서에서는 같은 날 고시원 취사장 냉장고에서 김치, 과일 등 음식을 훔쳐먹던 박모(27ㆍ무직)씨가 붙잡혔다. 박씨는 "사흘동안 굶어 너무 배가 고파 예전에 살던 고시원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었다"고 말했다.
생계형 범죄가 늘면서 범인을 검거한 경찰관들조차 이들의 딱한 사연에 혀를 차고 있다. 한 경찰관은 "아무리 배 고프고 살기 막막해도 범죄는 엄정하게 처벌해야 하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하도 딱해 구내식당에서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사 먹인다"고 말했다.
생계형 범죄를 막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진선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간사는 "먹고 입고 자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정부는 생색내기 정책들만 내놓고 있다"면서 "서민들이 배곯지 않는 종합적인 대책을 즉각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창원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일수록 '이미 나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회복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해 다시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면서 "강력한 처벌보다는 이들이 윤리의식의 회복할 수 있도록 교정교화 프로그램을 설계, 운용하는 것이 범죄 예방에 더욱 효과적이다"고 말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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