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후반이 되면 대개 사람들은 자기 정리를 하는데, 저는 정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열정과 관조가 모두 느껴지지 않나요?"
열네번째 시집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발행)을 낸 시인 황동규(71)씨. 수화기 건너편 시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톤은 높았고, 말은 열정적이었다. 1958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을 받고 저 유명한 시 '즐거운 편지'로 등단했던 시인은 지난해 시력(詩歷) 50년을 넘겼다. 겨울밤>
이번 시집은 지난해 그가 등단 50년을 맞아 대표작을 뽑아달라는 주문에 "내년 봄 나올 시집이 지금까지 나온 시집 중 가장 정열적일 것"이라고 예고했던 바 그대로다.
시인에게는 몰려오는 추억조차 화려하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에 올라 망망한 동해 바다를 바라보던 스무살(그의 등단 무렵이다) 시절을 회감하는 '무굴일기2'의 난무하는 빛의 이미지는 그 하이라이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눈부신 원반의 황홀, 해와 바다가 몸과 몸으로 맞비비는 빛부심, 아 이건 또 뭐냐, 북 치고 피리 불고, 환하고 적막했다!'
감기 뒤끝에 38.5도까지 오르는 열병을 앓은 나이든 육체는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시인은 오히려 큰 발걸음으로 개나리가 울타리를 이룬 산책로를 걷는다. 그리고 생을 감각한다. '신열 가신 자리에 확 지펴지는 공복감, 이 환한 살아있음!/ 봄에서 꽃을 찾을까, 징하게들 핀 꽃에서/ 봄을 뒤집어쓰지./ 광폭(廣幅)으로 걷는다' ('삶의 맛'에서)
이번 시집은 <꽃의 고요> 이후 3년 만에 나온 것이다. 고희를 통과한 시인이 보여주는 관조의 세계는 더욱 그윽해졌다. 시인은 주로 가을 속에 있는데, 그것은 아파트단지의 낙엽송 앞에서 '다 왔다./ 하늘이 자잔히 잿빛으로 바뀌기 시작한/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마지막 잎들이 지고 있다, 허투루루.'('삶을 살아낸다는 건'에서)처럼 노경(老境)에 이르렀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꽃의>
이윽고 전철의, 버스의 손잡이를 놓지 않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며 '그동안 너무 붙들고 살았어./ 버스 전철의 손잡이, 가방손잡이./ 놓았다고 생각하며 계속 잡아가고 있던 세상살이 손잡이, 갈아 탈 역 놓치고도 붙들고 있었어./ 그만 손 놓고 살자!' ('시인의 가을')에서처럼 집착의 포기, 무욕에 대한 지향으로 이어지더니 좀더 나아가, 지우 김병익씨가 지적한 대로 '죽음 속 삶에 대한 사색'에 다다른다.
안성 석남사 땅바닥에 융단처럼 깔린 이끼를 발견한 시인은 '바로 이게 혹시 저 세상의 바닥은 아닐까?/ 살아서는 두 발을 올려놓지 말라는'('안성 석남사 뒤뜰'에서)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담배는 끊은 지 오래고, 술은 조금, 여행을 즐기면서 건강을 유지한다"고 근황을 전한 황동규 시인은 "50년간 그래왔듯 시와 산문 쓰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다. 나는 늘 새길을 모색하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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