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앞에서 대학생들이 '벼룩의 간을 빼 먹어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전경련을 규탄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국 66개 대학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학생회 등으로 구성된 '21세기 한국 대학생 연합' 소속인 이들의 시위는 지난 주 노사민정 대타협 이후 재계가 기다렸다는 듯 '대졸초임 삭감' 방침을 밝혔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다. 임금 삭감은 구체적 대상과 액수까지 분명하게 제시된 반면, 재계가 약속한 고용수준 유지 방법은 공란으로 남겨둔 채 전적으로 개별기업의 재량에 맡겨졌기 때문이다.
▦ 고용 빙하기를 맞아 절대적 '을'의 위치로 전락한 이들의 외침이 칼자루를 쥔 '갑'을 규탄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자 자칫 제 발등을 찍는 꼴이어서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이 생존권 문제를 들고 재계 본산의 면전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눈치가 보여 동참은 못하지만 그들의 '작은 거사'에 공감하는 수십만명의 대졸자들이 있어서다. 쏠림 현상에 유난히 약한 우리사회의 생리를 생각할 때, 누군가 잘 조직되고 적절히 포장된 불씨만 던지면 언제 어디서 '세대 전쟁'이 벌어질지 모른다.
▦ 이미 인터넷 카페 등에는 '세대 착취'라는 선동적 표현이 나돌고 스스로를 '이명박 세대'로 비하하는 20대들의 비애와 분노를 담은 글들도 줄을 잇는다. 정부가 잡 셰어링을 외환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에 비유하며 이를 '내셔널 브랜드' 혹은 시대정신으로 만들자고 바람 잡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근원을 따지면 결국 설계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노조는 다루기 어렵고 기업의 의욕도 살려줘야 하니, 만만한 신참을 골랐다는 얘기다. 무릇 고통분담이란 '나의 희생'이 전제돼야 하는데, 지금의 설계는 비겁하게 '너의 희생'만 강요한 꼴이다.
▦ 더욱 답답한 것은 애초 이런 문제가 제기됐을 때 학계나 언론 등이 세대 갈등의 우려와 함께 기득권 양보를 통한 설득장치가 필요하다고 누차 강조했지만 모두 무시된 사실이다. 그래야 경제가 회복될 때 인적자본의 균형점 회복이 가능한데도 말이다. 지금은 일자리의 질은 물론 노동의 질도 함께 떨어져 미래를 갉아먹는 구조다. 이번 주부터 노사민정 합의의 이행을 점검하는 기구가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고 한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져 곳곳에서 수많은 파열음이 예상되지만 지금이라도 각 주체가 합의의 진정한 뜻을 살리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