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해인 올해, 화랑가에서도 유독 소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풍요의 상징인 소는 대개 따뜻하고 넉넉한 모습이다.
그러나 4일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 신관에서 개막하는 화가 이종구(55ㆍ중앙대 교수)씨 개인전 '국토:세 가지 풍경' 전에 나온 소들은 잔뜩 성이 나있다. 터럭 하나까지 세세하게 보이는 사실적인 소들이 눈을 부릅뜨고 관람객을 노려본다. 그들이 밟고 선 땅은 온통 검은빛이다.
이씨는 "소는 우리 시대 농촌 현실이자 농민의 초상이며, 그들의 분노는 곧 농부들의 분노"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황폐화시킨 데 대한 분노지요. 수입과 개방으로 인해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소득이 되지 않는 현실, 그들의 오랜 경제적 방식을 무너뜨린 현실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는 누런 양곡포대에 주름진 농민들의 얼굴을 극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으로 잘 알려진 '농민화가'. 농촌 문제에 대한 직설적 표현이다. 소 그림도 1980년대부터 꾸준히 그렸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불거진 지난해 이후 집중적으로 작업했다.
전시작 중 '검은 대지-무자년 여름'은 직접적으로 주제를 드러낸다. 침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소의 머리 위로 미국 항공기가 날고 있다.
소 사진을 찍어 작업하는 그는 요즘 일소가 많지 않아 모델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신문에서 사진으로 본 소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전남 구례까지 가는 등 전국을 헤맸다.
"어떤 소는 수줍어서 카메라를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어떤 소는 아주 공격적으로 눈을 맞춰요. 정말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워낭소리'에서도 할아버지와 소의 얼굴이 똑같이 닮았잖아요. 제가 그리고자 하는 바로 그런 소였는데, 미리 몰랐던 것이 안타까워요."
이번 전시는 성난 소들을 그린 '검은 대지' 연작과, 촌스러운 몸빼바지나 플라스틱 양동이 같은 농민들의 생활도구를 그린 '살림', 백두대간이나 경주 남산, 태백산에 뜬 달을 담은 '만월' 연작으로 구성됐다. 농민의 얼굴은 딱 두 점밖에 없다.
"농촌의 현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 그릴 수 없을 만큼 처참합니다. 그래서 농민 주위에 있는 것들, 즉 땅과 소, 살림살이, 풍경을 통해 그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이후 여러 곳에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는 그는 "앞으로 농민의 얼굴만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4월 26일까지. (02)720-1524
글ㆍ사진=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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