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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8> 라디오 DJ시절과 나의 스토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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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48> 라디오 DJ시절과 나의 스토커들

입력
2009.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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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기자 1호라는 호칭이 나한테 따라 다니는데, 사실은 1호라는 기록이 또 하나 있다. 우리가요만 틀어 준 라디오 DJ는 내가 처음 일 것이다.

60년대에 동아방송 라디오의 인기 프로그램 중에 '3시의 다이얼'이 있었는데 DJ는 최동욱이고 인기가 아주 높았다. 같은 시기에 MBC 라디오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DJ인 이종환의 인기도 대단했다. 그런데 이들이 취급한 음악은 외국 노래(주로 미국 팝송)였다.

나는 1964년 동아방송에 처음 출연하면서 방송을 시작했다. 물론 한국일보(주간한국) 기자 신분이면서 방송 프로그램을 맡은 것이다. 그 당시 동아방송의 임석규 음악부장이 나에게 출연 제의를 했다. 1주일에 한번이고 한번에 1시간이었는데 반응을 봐서 매일 나가는 것으로 하자는 제의였다.

제목은 '세월 따라 노래 따라'이고 패티김의 여동생 김정미와 함께 하는 이른바 더블 진행이었다. 하지만 요새처럼 작가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원고를 써서 방송을 해야 하는 통에 아주 애를 먹었다.

그 일을 계기로 해서 나는 KBS 라디오 및 TV, MBC, CBS등에 출연을 하다가 동양방송(TBC) 라디오에서 '가요 중계실'이라는 2시간짜리 DJ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

60년대 후반이다. 일요일도 포함해서 매일 오후 3시5분부터 2시간동안 우리 가요 신청곡을 틀면서 초대 손님과 대담도 하고, 문화적인 이야기라든가 사회성 있는 이야기 등도 하고, 신문이나 잡지를 읽기도 했다.

물론 전부 생방송이고, 자그만 스튜디오 안에서 내가 직접 턴테이블을 돌리면서 전화로 신청곡을 받았다. 당시 정인섭씨가 방송부장이었고, 박광희 신광철 옥충헌 등 3명의 PD들이 교대로 수고를 해 주었다.

내가 전화로 신청곡을 받으면 밖에서 재빨리 레코드 실로 달려가서 LP판을 찾아와야 되는데 어찌나 숙달이 되었는지 순식간에 찾아오면 내가 그걸 받아서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러니 항상 긴장이다. 그때 '가요 중계실'을 통해서 데뷔한 가수들이 많았는데 와일드 캐츠, 어니언스 등이 생각난다. 특히 어니언스는 내가 즉석에서 이름을 지어 주었다.

보컬그룹들이 데뷔를 했다가 자꾸 해체되곤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양파처럼 한번 껍질을 벗겨도 또 남아 있으라는 뜻으로 지었는데 임창제와 이수영 두 사람이 그 이름을 무척 좋아해서 기분이 좋았다.

디스크 자키 프로그램은 외국노래만 될 것이라는 기존 관념을 깬 신선한 편성이 들어맞았고, 한국 대중가요에 대한 청취자들의 욕구가 컸기 때문인지, '가요 중계실'은 청취율이 굉장히 높았다.

아마도 같은 시간대에 가장 높은 청취율이었을 것이다. 음악신청을 엽서로도 받았는데 매일 1,000통이 넘게 왔다. 엽서뿐만 아니라 된장, 고추장, 미역, 호두과자, 굴비 등등 지역 특산물을 보내 주기도 했다.

청취자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내 이름이 많이 알려졌는데 문제가 생겼다. 방송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면 20여명의 여성 팬들이 나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유명 연예인이 아니고 신문기자라고 설명을 해도 "그런 거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사인을 해 달라는 정도는 경미한 일이다.

아예 내 주머니 속에다 자기 사진을 넣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언제 찍었는지, 내 사진을 크게 확대해서 들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잊지 못할 3명의 스토커들이 나를 집요하게 따라 다녔다.

하나는 명문 K여고 3학년 학생인데 무척 수줍을 타는 성격인데도 방송 끝날 때 되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편지나 선물 따위를 주고 가곤 했다. 학생이 학교를 그렇게 자주 조퇴를 하면 되느냐고 싫은 소리를 했더니 몸이 아파서 휴학 중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사는데 매일 가요 중계실 듣는 것이 위안이 된다"는데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3년 동안 했는데 1년을 꼬박꼬박 찾아오던 이 여학생이 어느 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는 지독한 스토커였다. 20대 후반쯤 되는 여인인데 이 사람은 방송국에서 기다리지 않고 아예 신문사(한국일보)로 나를 찾아 왔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찾아 왔다.

신문사 선후배, 동료들이 오해를 할 정도였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올 때마다 길고 긴 편지를 써서 경비실에 맡겨 놓고 가곤 했다. 편지의 내용은 항상 같은 것이다. "당신은 나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이건 신령님의 뜻이다."

또 한명의 스토커는 나이가 30대 초반쯤 되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 내가 타고 다니던 승용차에 낙서를 하는 것으로 나를 괴롭혔다. 역시 자기와 결혼하자는 것이다.

잘 지워지지도 않는 사인펜으로 낙서를 해 놓는 바람에 애를 먹었는데 방송 끝나고 나가서 차를 타려고 하면 영락없이 그 여인이 와서 낙서를 해 놓았다. 나는 견디다 못해 방송국에 갈 때에는 승용차를 타지 않고 택시를 타고 다녔다.

대단한 인기인도 아닌 사람에게 스토킹이 이렇게 심한데 인기 많은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선수들이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지 이해가 된다. 스토커인줄 알지만 인기관리 때문에 그들을 마구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런 심리를 전문가들은 '에로토매니아(Erotomania)라고 설명한다.

자기자신 조차도 통제가 안 되는 고도의 집착인 것이다. 벌써 40년 전 이야기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토록 나를 성가시게 했던 그들이지만 때로는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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