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1913~1994).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중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각종 정치적 비리 사건 때마다 따라붙는 수식어인 '게이트'를 유일한 유산으로 남겼다는 비아냥과 함께 외교분야에 있어 탁월한 식견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이 문제적 인물의 삶이 영화 '프로스트 vs 닉스'(상영중)와 '왓치맨'(5일 개봉)을 통해 스크린에 되살아났다.
'프로스트 vs 닉슨'은 한물 간 토크쇼 진행자 프로스트(마이클 쉰)가 인터뷰를 통해 '워터게이트' 등에 대한 닉슨(프랭크 란젤라)의 대국민 사과를 받아내려 한 실화를 옮긴 영화. 거액의 인터뷰비를 거리낌 없이 요구하고, 권력에 대한 미련과 욕망을 수시로 드러내는 닉슨의 인간적 면모가 정밀묘사 돼 있다.
정치적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툭툭 던지는 닉슨의 한마디 한마디가 눈길을 잡는다. "그 구두 이탈리아제 맞죠? 너무 여성적인 것 같지 않소? 연예계에선 그런 게 흠이 안 되나?"
"어젯밤엔 즐거웠소?… (혹시) 바람 피웠소?" 겉으론 페어플레이를 부르짖는 신사인 양하면서도 승리를 위해선 어떤 권모술수도 마다하지 않을 노정객의 노회함이 엿보인다.
특히 프로스트가 물증을 들이밀며 '워터게이트'와의 직접적인 연계성을 지적하자 닉슨이 "대통령의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제왕적 대통령을 꿈꿨다가 몰락한 미국 보수주의 정치 거물의 모순된 양면성이 실체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동명의 그래픽 노블(주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소설 같은 만화)을 바탕으로 한 '왓치맨'은 허구성이 짙다. 초능력을 지닌 왓치맨들이 베트남전에 참전, 승리를 이끌어내면서 닉슨(로버트 위스든)이 권좌에서 물러나기는커녕 3선 연임에 성공한 것으로 영화는 서술한다. 닉슨이 권좌를 단단히 지키면서 미국과 구 소련 중심의 냉전도 더 한기를 뿜는다는 것.
군중들이 닉슨의 선거 승리 연설 방송을 지켜보며 분노의 화염병을 던지거나 닉슨의 3선을 견인한 왓치맨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장면을 통해 이 영화는 부도덕한 보수주의자 닉슨에 대한 미국인의 뿌리 깊은 반감을 드러낸다.
'프로스트 vs 닉슨'과 '왓치맨'이 공통적으로 묘사하는 닉슨의 명문가 콤플렉스도 흥미롭다. '프로스트…'에서 한밤중 술에 취한 닉슨은 프로스트에게 전화해 푸념을 늘어놓는다. "자넨 평범한 감리교 집안에서 자라 명문 대학에 갔지…그곳의 속물들도 자넬 깔보든가? 그게 우리의 비극이야. 안 그래?"
'왓치맨'에선 핵전쟁을 눈앞에 둔 닉슨이 유사한 독설을 내뱉는다. "(동부가 미사일 공격을 받으면) 하버드 밥맛들은 끝장이겠군. 도망칠 때도 똑똑한지 봅시다." 닉슨은 아홉 살 때 아버지의 목장사업이 실패하면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고, 학비 때문에 하버드대와 예일대에 진학하지 못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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