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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6> 소리꾼 임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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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16> 소리꾼 임진택

입력
2009.03.04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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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보다 빨리 눕는, 그러나 먼저 일어서는 힘으로 그가 다시 간다. 1년 틀어박힌 끝에, 그는 새 길을 찾았다. '중도'의 깃발 아래 그는 다시 길을 간다. 깃발이란 말에 지난 시절의 선동성은 더 이상 없다. 한 여정 끝에, 통찰은 찾아왔다.

연출가이자 소리꾼인 임진택(59)씨가 큰 판을 들고 나왔다. 그에게 예술은 여전히 사회변혁이다. 소통ㆍ전달의 위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술의 중심이자 궁극적 가치인 '예술성'에 대한 탐험이라는 생각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 중이다.

- 최근까지도 큰 판 만드는 일에 열심이었다.

"'통과 의례 축제'는 예산 지원이 끊겼고, '야외 공연 축제'는 남양주, 과천시와 행정상의 문제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일을 하자는 결심이 섰다. 50살 때 통과의례를 치렀으니, 60대는 이 일에 전념할 생각이다. 어찌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60으로 접어들었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이기도 하다."

- 어떤 특별한 계기라도.

"지금 보니 세상이 한참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파측의) 실수와 오류에다 정권의 오만ㆍ무능이 겹쳐 빚어진 결과다. 방향과 신념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까지 합쳐서 '잃어버린 50년'이라 한다. 나 자신으로서는 그간 했던 일이 소멸돼 간다는 위기의식이 컸다. 특히 환갑을 앞두니 자괴감마저 들었다. 나의 창작 판소리 세 바탕은 잊혀져 간다. 소리꾼으로서 나의 예술적 성취는 뭔가, 미래에 어떤 가치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 자기 반성이었나.

"정치판에 뛰어들어 정치운동 할까도 생각했다. 사실 젊을 때부터 해온 나의 예술ㆍ문화 활동은 정치적 실천이었다. 문화운동의 필연성에 대해 깊이 재고하게 됐다. 정치는 거꾸로 갔고, 상업성 탈피한 예술을 부르짖어 봤지만 결국 반생명적인 '문화 투기'만 남았다.

1년 동안 은둔하고 고민했다. 좌파적 사고에 대해 굉장히 회의했다. 나는 중도라는 결론에 달했다. 좌우만 빼면 모든 것이 중도ㆍ실체다. 좌우란 방향을 나타내는 관념일 뿐이다. 실체는 그 사이에 있다. 이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문화다."

- 그 같은 확신은 어떻게 생겨났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김지하의 '역동적 중도론'이 맞다. 절대적 부분은 중간에 있다. 이 점을 인식해야 실천의 방향이 생긴다. 진보의 반대는 퇴보나 정체이지, 기분에 휩쓸려 좌우로 얘기되는 게 아니다. 중도는 공격받는 이념이다. 사기꾼들이 써 왔기 때문이다.

중도의 실체와 존엄성은 오해되고 있다. 사회의 갈등을 주제로 한 토론장에서의 대립상을 보라. 양비 아니면 양시가 팽팽히 대치할 뿐이다. 절충ㆍ타협ㆍ양보할 수 있는 올바른 길이 있다. 그랬다면 용산 참사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 당신의 중도는 현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인가.

"10여년 동안 민주적 정권 하에서 획득해온 문화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다. 내가 만들었던 판소리에는 정치적 함의가 강하고 지난 시절 엄청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똥바다'의 거름을 먹고 자란 386은 그러나 실패했다.

내가 거름을 잘못 주었다. 나의 새 판소리가 새 거름 되길 바라는 것이다. 지난 시절 표방했던 가치가 과연 진정성 있었나는 생각마저 든다. 민주를 표방하면서 순수하지 못했던 측면이 이렇게 망쳐 놓았다.

자신이 속해 있던 진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언행으로 오해받는 것은 아닐까, 함께 했던 사람들을 모독하는 것이 아닐가 하는 우려도 되지만, 내 생각에 거짓은 없다. 권력에 있던 일부의 오류 때문에 폄하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

- 이명박 정부 수립으로 촉발된 것인가.

"보수화된 시대에 접어들어 예술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은 나의 내부를 향한 반성이었다. 진보의 가치가, 진보 진영의 부족 때문에 능멸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무가치하고 실없는 일부 예술이 형식이나 테크닉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현실을, (내가) 부정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위기감이기도 했다.

진보 진영의 사회참여적 예술을 가장 먼저 주창해온 우리가 국민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진보적 예술의 가치 자체가 훼손당할 수 있다는 느낌이다. 예술이란 상황과의 관계이며 쟁투인 이상, 시대를 초월하는 높은 완성도와 보편적 주제를 반드시 담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 최근 발표한 '새로운 판소리 열 두 바탕' 창작안이 거기 대한 답인가.

"'오적'과 '소리 내력' 합쳐 한 바탕, '똥바다' '오월 광주' 등 지금까지 판소리 세 바탕을 지었다. 군사정권 때 저항의 상징으로 지었던 만큼 그 어느 작품보다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정치적 판소리의 효능은 떨어졌다는 소리까지 공공연히 들리면서 자괴감마저 들었다. 세종대왕, 이순신, 정약용, 전봉준, 김구, 허준, 홍길동, 장보고, 대장금, 송홍록(동편제), 신재효, 임방울(서편제) 등 민족문화를 빛낸 위인들을 그린 새 판소리 열 두 바탕 창작 계획을 밝힌 것은 그래서다.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1년에 한 편씩 12년 해나갈 사업이다. 이 일은 박동진, 박동실(김소희의 딸), 그리고 나로 이어지는 창작 판소리의 3대 계보를 재확인한다는 의미도 크다."

- 사설은 누가 쓰나.

"판소리 사설을 제일 잘 쓰는 사람은 김지하다. '오적' '대설'을 보라. 또 '소리내력'이나 '똥바다'는 인터넷 괴담으로 어지러운 이 시대를 야유하는 판소리 사설이라 해도 좋다.

판소리 문체를 아는 소설가 최인석, 판소리 문체로 소설 '지리산 반달곰'을 쓴 이병천, '녹두장군'의 송기숙, '다산'의 한승원, 대학 시절부터 판소리를 한 김명곤 전 문화부장관 등은 내가 운을 떼니 다들 찬성했다. 최근 TV로 널리 알려진 허준, 대장금 등은 해당 작가에게 제안해 볼 생각이다."

- 누가 부르나.

"이제 나는 기가 달려 못다부른다. 다 외워서 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세종, 허준, 대장금 등 3개는 꼭 하고 싶다. 사설도 내가 다 쓸 계획인데, 세종과 허준은 내가 직접 부를 생각이다.

세종대왕을 맨 먼저 모시고 싶은 것은 왕의 신분임에도 신하와 같이 연구하며 논쟁까지 벌이는 열정, 연구하다 눈 멀어 가는 과정 때문이다. 젊어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망막이 박리돼 어쩌면 노년에 눈 멀게 될지도 모를 나로서는 남 같지 않다. 그 밖에 성창순, 조상현, 정철호, 김일구, 안숙선, 박윤초 등 명창들에게도 작창을 부탁할 생각이다."

- 체계적 준비는?

"문화사적인 과업임을 널리 알려 공적인 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문화예술계, 해당 지자체의 관심으로 승화시키는 방안을 생각 중이다.

전봉준은 정읍, 홍길동은 장성, 임방울은 광주, 이순신은 여수ㆍ충무ㆍ아산, 정약용은 남양주(생가)나 강진(유배지), 세종은 여주 혹은 기념사업회, 장보고는 완도, 대장금은 음식 관련 협회, 허준은 한의사 모임ㆍ산청(고향) 등과 연계시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나는 공식적 유산으로 살아남을 작품을 구상한다. 예전 같으면 운동성을 염두에 뒀겠지만 이제 교육적 효과를 살려 어린이들도 부를 수 있게 할 것이다.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희망하는 것은 그래서다.

●내 판소리 내력

그의 반골 기질은 타고났다. '비어'에서 '광주항쟁'까지, 판소리라는 양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연은 서울대 외교학과 2학년, 연극반일 때로 거슬러 간다.

서클 선배인 김지하 시인이 쓴 '오적'을 유인물 '민주전선'을 통해 알게 됐다. 이후 탈춤반이 생기고 난 뒤에는 김 시인의 '비어'를 판소리로 엮었고, 그 사설은 가톨릭 교단의 문화지 '창조'에까지 실렸다. "당시 편집장으로 있던 구중서씨의 게재 결정을 김수환 추기경이 승인했죠." 그는 그 중의 눈대목 격인 '소리내력'이 너무 재미있어 잠꼬대까지 할 정도였다.

판소리꾼으로서의 첫 공연은 3년 뒤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서대문구치소의 철창 안에서 펼쳐졌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과 그 자리에서 노래 시합이 붙었다.

"남진, 나훈아를 소리죽여가며 부르던 자리에서 내 차례가 왔어요. '소리 내력'을 불렀더니 그 후로는 나를 완전히 어른 취급하더군요." 곧 그 소리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인기 레퍼토리로 굳어졌다. 판소리를 처음 접해본 문인들의 호응은 특히 뜨거웠다. 이후 그는 본격 판소리꾼으로 거듭났다.

이듬해 명동 카페 떼아트르에서 했던 '오적' 공연을 본 인간문화재 정권진(심청가 보유ㆍ전남대 국악과 초빙교수)씨는 "세계 최고의 모노드라마"라고 극찬했다.

국악예고 교실을 빌려 그를 "임진사"로 칭하며 가르치던 정씨는 머잖아 그를 사실상의 전수자로 삼았다. 창작 판소리 '오적'과 '똥바다'가 그래서 나왔다. 1999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오적-소리내력' '똥바다' '오월 광주' 등 자신의 대표작을 엮어 가졌던 판소리 세 바탕은 저간의 총정리였다.

임진택씨는 "1994년 '녹두장군' 사설 쓰는 데 도전했다가 실패했지만 이제는 수가 다 보인다. (작창) 할 때가 됐다"고 했다. 또 하나의 판소리 양식, '임진택 류'가 귀명창들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장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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