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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6> 이화 - 성(性)의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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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6> 이화 - 성(性)의 공산주의

입력
2009.03.0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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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산문을 서른 댓 무렵부터 '소설'이라 우기며 가끔 끼적거리게 되면서, 다른 사람 소설 읽기를 꺼리게 되었다. 쓰는 재주는 없어도 읽는 감각은 조금이나마 있다는 게 문제였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질투가 나고, 시원치 않은 소설을 보면 욕을 하며 중간에 팽개치게 된다. 자연히 소설에 대해 글을 쓰는 일도 삼가게 되었다.

정말 감동하며 읽은 소설(최근 몇 년 동안엔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삶> 이 그랬다)에 대해 좋은 소리를 하는 거야 거북할 것 없지만, 소설에 이르지 못한 소설을 두고 싫은 소리를 하는 게 영 께름칙한 것이다. 그럴 때면 당장 "제 소설이나 잘 쓰지" 하는 말이 귓전을 울린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엊그제 조해일의 <겨울여자> (솔ㆍ1991)를 읽었다. 말하기 께름하지만, <겨울여자> 는 하급대중소설이다. 콧대 높은 문학과지성사가 문을 열자마자 이 책을 냈다는 것(1976)이 기이할 정도다.

나는 여기서 '대중소설'이라는 말을 중립적 의미로 쓰고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에서 이문열에 이르기까지 일급 대중소설가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겨울여자> 는 그런 사람들의 작품이 아니다. 나는 지금 소설가 조해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소설 <겨울여자> 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조해일에 대해서라면, 일급 대중소설가라고, 심지어 이문열처럼 부분적으로는 본격소설가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 <겨울여자> 의 대중성은 격을 갖춘 대중성이 아니다. 그것은 조해일의 소설세계에서도 사뭇 낮은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이 책을 대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6년 초판본(문학과지성사)을 나는 꽤 오래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읽어내지 못했다. 책을 산 것이 영화(1977)를 본 뒤였는데, 일반적 경우와 달리 원작이 영화만 못해 보였다. (내 기억이 옳다면 이 작품은 라디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나는 그 책을 그냥 지니고만 있다가 몇 페이지 들추지 못한 채 잃어버렸다.

영화 스토리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순 없지만, 소설의 끝머리를 이루는 주인공 이화(伊花)의 야학활동이 영화에선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문학과지성사판과 솔출판사판의 내용이 사뭇 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이 소설이나 영화를 못 본 독자를 위해 <겨울여자> 얘기를 잠깐 하자. 소설 <겨울여자> 는 유이화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고3때부터 대학 졸업 몇 년 뒤까지 겪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화의 성격과 행동은 일반적 성장소설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보통의 성장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비순응주의에서 순응주의로 나가는 데 비해, 이 소설의 주인공 이화는 순응주의에서 비순응주의로 나아간다. 그 비순응주의의 핵심은 '성(性)의 고른 분배'다.

이화의 성장은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거의 다 남자들이다)과의 관계를 딛고 이뤄진다. 작품 들머리에 이화는 '사람 잡는 여자'로 나온다.

기이한 영적 운동에 의해 이화와 똑같은 꿈을 꾸기도 하는 민요섭은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 이화를 끌어안았는데, 그녀가 극도의 혐오감과 수치심을 드러내자 스스로 제 목을 칼로 그어 자살한다. 그리고 사실상의 강간을 통해 이화에게 성을 가르쳐준 우석기는 군대에서 사고로 죽는다.

이화의 첫 성 경험에 대한 작가의 시각엔 이해할 만한 점이 있다. 옷을 입은 채 한 남자에게 안긴 걸 그리 수치스럽게 여겼던 여자가, 불과 한 해 뒤엔 백치라도 된 듯 남자에게 제 몸을 거리낌 없이 맡기는 것은, 민요섭의 자살이 이화에게 열어놓은 어떤 연민의 세계 덕분(탓?)일 테다. 거기까지는 그럼직하다.

그러나 작가는 우석기에게 학생운동권의 한 자리를 내줌으로써 아우라를 부여한다. 그가 이화에게 한 짓에 대한 윤리적 심문을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 우석기의 사람됨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우석기의 죽음 이후, 이화의 수동적이었던 성격은 능동적으로 바뀐다. 그 능동성이란 주로 성적 능동성이다. 그녀는 성적(性的) 공산주의자가 된다. 그녀는 성의 사유를 혐오한다. 능력에 따라 (성적으로) 일하고 필요에 따라 (성적으로) 분배받는 성의 공유가 그녀의 삶이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성적 능력이 뛰어나므로 언제나 성의 적극적 공급자가 된다. 그녀가 창녀가 아닌 것은 성을 팔지 않고, 무료로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우석기의 친구 오수환과 자고, 제 학교 교수 허민과 자고, 상층부르주아 출신 빈민운동가 김광준과 잔다.

그녀는 자신이 한국 남자 모두에게 속해있고 한국남자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가 왜 자신의 잠재적 일시적 연인들을 한국 남자로 제한했는지 의문이다. 그녀의 성적 공산주의는 국제주의와 연결되지 않는다.

작가는 조심스레 등장인물들을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과 연결시키고 이화로 하여금 가족주의를 비판하게 함으로써 소설에 사회성을 불어넣으려 하지만, <겨울여자> 의 주제는 이화라는 여자 개인의 성적 공산주의에 머물 뿐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 유신이라는 정치적 야만기에 발표됐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해도, 이 소설에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다.

이 소설의 실패는 내용의 실패만이 아니라 형식의 실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연결은 아슬아슬하고, 사제간의 대화는 어색하며, 성적 공산주의자가 빈민운동가로 넘어가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다.

'표4'('책 뒷표지의 바깥면'을 가리키는 출판계 용어)의 글이라는 것이 늘 그렇고 그런 것이긴 하나, <겨울여자> 도 내용 없는 상찬의 대상이다.

이청준은 "돈과 허영과 부박과 투기가 미덕처럼 경쟁하는 시대에 흰눈송이처럼 순결한 영원한 처녀, 흡사 18세기 북구(北歐)의 어느 소녀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여자가 과연 우리 주변에 아직도 있는가"라고 썼고, 신학자 서광선은 "여주인공 이화는 성처녀(聖處女)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녀의 사랑은 성적, 개인적인 한계를 넘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찬 사랑이다"라고 적고 있다.

서광선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겨울여자> 에서 이화가 수행하는 사랑은 커다란 슬픔과 동행하는 사랑이다. 눈물을 동반하는 사랑, 연민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 슬픔과 눈물의 원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이청준의 코멘트는 무성의하다. "18세기 북구의 어느 소녀"와 "흰 눈송이처럼 순결한 영원한 처녀"라니? 그리고 "과연 우리 주변에 아직도 있는가"라니? 그렇다면 과거의 한국에는 그가 순결하고 영원한 처녀라고 말한 성적 공산주의자들이 여자들 가운데 흔했단 말인가?

나는 지금까지 <겨울여자> 라는 소설의 모자람을 계속 들춰왔다. 그렇다면 이화를 왜 이 글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지? 내가 내세운 이화는 소설 속의 이화가 아니라 영화 속의 이화다. 물론 원작 소설 자체에 모자람이 있는데 영화가 넉넉할 수는 없다.

각색자 김승옥이나 연출자 김호선인들 무(無)에서 유(有)를 뽑아낼 재주가 있었겠는가? 희미한 기억 저편에서도, 나는 영화 <겨울여자> 역시 그렇고 그런 영화로 여긴다.

그러나, 아마도 삽입곡의 영향을 받아, 나는 지금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가슴이 설렌다. 김세화씨의 '눈물로 쓴 편지'(소설 속에도 가사를 조금 달리 해서 수록돼 있다. 석기가 이화를 꾀기 시작하는 장면이다)와 누가 불렀는지 모를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들을 만했다.

이 작품이 내세우는 성적 공산주의는, 그 부작용을 막을 적절한 장치를 마련한다면, 한 사회의 성적 작동 원리로 추구해볼 여지도 있다. 나는 물론 성적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성에 사유재의 성격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이 완전히 상품화한 시대에 이화의 성적 공산주의는 혁명적 성격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의 성적 공산주의를 이해할 준비는 돼 있다.

끝으로, 나를 이화에게 이끈 것은 <겨울여자> 라는 소설도 아니고 같은 제목의 영화도 아니었음을 털어놓아야겠다. 나를 이끈 것은 장미희라는 배우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장미희씨의 얼굴을 내세운 <겨울여자> 포스터가 지금도 생각난다. 내겐 성적 공산주의자 이화보다 그 역을 해낸 장미희씨가 더 포근하다.

배우로서 그녀가 겪었다는 이런저런 풍상에 넘어지지 않고 꿋꿋이 버텨낸 그 견딜성! 같은 세대의 나는 그녀 앞에서 모자를 벗는다. 나는 그녀가 광고 모델로 나오는 오렌지주스를 열심히 마신다. 비판으로 그득한 이 글은 배우 장미희를 향한 오마주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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