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름하면 떠오르는 회사는 코닥이다. 세계적인 기업인 코닥의 창업자였던 조지 이스트만은 당대 최고의 부호였을 뿐 아니라 훌륭한 경영인이었다. 그는 혁신적인 경영 철학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면서 종업원들에게 더 큰 이익을 배분해주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1932년 어느 봄날,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발명가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이스트만은 책상 위에 간략한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이스트만이 카메라 사업을 창업하기 바로 1년 전, 미국 시카고에서는 또 다른 이례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아돌프 피셔라는 젊은 독일 이민자는 대규모 노동자 폭동을 주동했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악덕한 자본가들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버린 그가 교수대에서 외친 마지막 순간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두 인물의 이야기를 하버드 대학의 댄 길버트 교수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란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인생의 겉 모습만 보고 그 속의 행복을 단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행복에>
일평생 뚜렷한 업적 하나 이루지 못한 사형수 피셔와 크게 성공해 부와 존경을 얻은 이스트만.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마지막 순간 행복하다고 말한 사람은 피셔였고, 행복하지 않은 사람처럼 생을 마친 사람은 이스트만이었다.
두 인생의 마지막 장면은 마치 영화의 큰 반전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객관적인 삶이 행복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생각이 우리의 믿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굳이 재벌 총수와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직접 살아 보지 않아도 어떤 삶이 더 행복할지 당연히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가 진정으로 행복한지 단순히 판단할 수 없다.
행복은 인생의 외형적 모습보다는 그 인생의 주인공이 느끼는 매우 주관적인 감정과 경험에 의해 좌우된다. 아무 보잘 것 없는 삶의 주인공 피셔는 갑자기 자기가 전설적인 노동운동가로 역사 속에 흔적을 남기게 된 상황을 보며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반면 척추질환으로 침대에 누워 지난날의 향수에만 묻혀 있었던 이스트만은 세상의 존경을 받는 기업인이었지만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피셔와 이스트만의 삶을 소상히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심리학에서 행복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시작된 뒤 내려진 가장 중요한 결론 중 하나가 두 삶 속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결론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이 행복을 결정하는 정도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적다는 점이다. 중요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궁극적인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삶의 조건들을 향상시키는 데 투자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좋은 동네에 살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연구를 통해 이런 종류의 투자는 행복의 열매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당혹스러운 결론이 내려졌다.
왜 행복은 돈과 지위와 같은 객관적 조건들과 정비례하지 않는 것일까. '행복=조건/기대'라는 큰 틀의 공식을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외적 조건이나 성취가 이 공식의 '분자'값에 해당된다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주관적인 기대의 값이나 삶의 해석 방식 등은 '분모'값이 된다.
객관적인 성취나 업적만큼 행복이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성취하는 만큼 기대도 커지기 때문이다. 분자 값이 아무리 커도 분모 값이 같은 속도로 커지면 최종 값은 변하지 않는다.
경제적 부와 행복감의 관계를 보자. 2차 세계대전 직후와 비교하면 미국, 영국, 일본의 국민은 그 당시의 화폐가치로 계산해도 현재 몇 배 높은 소득을 누리고 있다. 국가의 평균 행복 값은 그러나 변함이 없다.
한국의 경우는 더 드라마틱하다. 불과 30년 전과 비교하면 한국은 당시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부유해졌지만 훨씬 더 행복해졌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소득 증가에 상응하는 기대 증가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숨차게 뛸 때는 걷기만 해도 좋을 것 같지만, 걷다 보면 어느새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이젠 눕고 싶어진다. 조건이 향상되면 거기에 익숙해지고 어느새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이다.
희랍의 금욕주의 철학자들은 행복감이 조건 대비 기대의 균형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 더 큰 성취와 돈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권고한 행복의 비법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와 욕심을 줄이는 전략이었다. 즉, 행복의 분자를 키우는 것보다 분모를 줄이는 것이 지혜로운 행복 추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기대와 壤??줄이라는 금욕주의적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기대를 무조건 줄이면 목표도 작아지고 큰 발전이 없다. 하지만 행복의 분모 값에 더 주목하라는 그들의 지적은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행복을 생각할 때 우리 대부분이 분자를 늘리는 것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삶의 조건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누가 더 많이 갖고 누리는지를 나타내는 행복의 분자 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진 것에 부여하는 주관적인 해석과 의미와 같은 '행복의 분모'가 행복의 개인차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이다.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지는 등 삶의 객관적 조건이 나아진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객관적 조건들의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
서은국 연세대 교수(심리학과)
■ 객관적 美보다 주관적 美를 찾아라
필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주관적 안녕감'이라는 과목을 10년 전에 개설해 지금까지 매년 강의하고 있다. 같은 강의를 한국과 미국에서 하다 보면 가끔 같은 내용에 대한 두 나라 대학생들의 반응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사람의 외모와 행복감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소개할 때다. 미국 학생들은 어느 정도 수긍한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한국 학생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행복감과 외모는 얼마나 관련성이 있을까. 물론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직관이지만, 과학은 직관을 믿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체계적으로 접근한 연구는 1995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디너(Diener)교수와 동료들에 의한 것이다.
연구 절차는 간단했으나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각 사람의 객관적 신체적 매력도를 얻기 위해 우선 실험실에 온 대학생들의 얼굴과 몸 전체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특히 여학생들은 뛰어난 화장술이나 머리 스타일 등으로 자신의 외모를 실제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오염' 변인들을 없애기 위해 사진 촬영에 앞서 화장과 장식을 다 지우도록 하고, 머리에는 샤워 캡을 씌우는 기발한 착상까지 했다. 이 '생얼' 사진들을 다른 대학생 '심판관'들이 한 장씩 보며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평가했다.
다른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아름답다고 평가한 사람들은 과연 다른 '보통 사람'들에 비해 행복했을까. 객관적인 아름다움과 행복은 놀랍게도 전혀 관련이 없었다. 출중한 외모를 가진 누군가를 보고 그가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성형 중독에 빠졌던 '선풍기 아줌마'와 같은 사건을 접하게 되는 한국의 대학생들은 쉽게 설득되지 않는 연구 결과다. 미국 대학생들이 외모에 신경을 덜 쓰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여러 번 받게 돼 연세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해 보았다.
결과는 미국과 같았다. 다른 연세대 학생들이 잘생기고 아름답다고 평가한 사진의 주인공들이 더 행복하다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김진주, 구자영, 이화령과 함께 진행한 연구에서 중요한 결과가 하나 발견됐다. 객관적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나눈 세 집단은 행복감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으나, 스스로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평가하도록 한 '주관적'인 신체매력 점수는 각 개인의 행복감을 강력하게 예측했다.
즉, 남들이 생각하는 외모 수준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지가 자신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자원의 소유보다 그것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더 중요하다는 지속적인 연구 결과와 일치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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