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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9> 뤼미에르극장-한국 최초의 다양성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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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9> 뤼미에르극장-한국 최초의 다양성 영화관

입력
2009.03.0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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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돌고 돌아도 우리나라처럼 영화 한편 자유롭게 선택하여 볼 수 없는 나라가 없었다. 1986년, 제 2차 영화법 개정으로 외국영화 수입 자유화가 되어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입업자와 극장주는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한국 영화관객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저급한 폭력 및 성애 할리우드의 비디오용 영화만 수입하고 있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시사성, 예술성,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는 철저하게 외면했다. 수입업자와 극장주의 '돈이 안 되는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고정관념을 깨뜨리지 않으면 돈도 안 되고 사회 변화가 없으면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것을 찾아라. 그리고 만들어라." 이것은 시대의 소명이기도 하고 인간 욕망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보면 누구에게든 그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달려가서 직접 보라고 권하였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작품과 만나는 기쁨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세계를 돌며, 영화를 보며 행복해 질 때 그 영화를 사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행복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영화 정말 좋아요. 사람들이 좋아할 거예요." 극장주들은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려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돈이 안 되거든."

그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취향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 관객들이 새로운 영화를 접하면 처음에는 어색해 하겠지만 곧 적응하여 좀 더 새롭고 좀 더 창조적인 것에 도전하고 싶어하리라 확신하였다. 내가 스스로 그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관객 시야가 다양해지면 당연히 다양한 영화를 찾게 되고 그에 맞춰 한국 영화가 다양하게 생산될 터였다. 영화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가 변화할 수 있는 이른 바 문화운동이 되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용기가 필요했다. 돈이 수없이 날아가야 했다. 그러나 해 보자. 1992년 여름, 서울 강남대로의 '다모아 극장'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영화관 이름을 '뤼미에르'로 지었다. 영화 창시자인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름부터 부르기가 어렵다고 투덜댔다. 나는 거기부터 시작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평생 보고 즐기는 '영화'를 만든 사람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뤼미에르 극장을 설립하기 전 1986년부터 소개한 다양성 영화들은 100여 편이 넘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플라시도 도밍고 주연의 오페라영화'오델로', 이태리의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 '시네마천국',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데이비드 린치감독의 '광란의 사랑',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 마이클 리 감독의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영국 영화 '비밀과 거짓말',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장국영 주연의 중국 영화 '패왕별희',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데뷔작 '길버트 그레이프', 스페인 영화 '세뇨라', 베트남 영화 '그린파파야 향기',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캐나다 영화 '몬트리올 예수', 프랑스 영화 '베어', 이란 영화 '가베', 칸느 영화제 수상작 덴마크 영화 라스폰 트리에감독의 '유로파', 벨기에 영화 '토토의 천국', '제8요일',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 호주영화 '샤인', 등등.

이러한 영화 운동이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는 사이 차츰 영화 마니아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레 영화 수입업자들의 시야도 넓어지기 시작하였다. '뤼미에르'의 다양성 영화운동이 시작된 지 몇 년이 지나 '동숭 시네마테크'가 문을 열었다. 이어 '시네큐브', '오즈', '선재 아트센타','서울 시네마테크' 등 다양성 영화 상영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예술 영화관'이라는 명칭의 영화관이 생기게 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도 발 벗고 나섰다. '아트 플러스'라는 명칭으로 전국적으로 예술 영화 전용관에게 일정의 운영자금을 지원해 주는 예술영화 전용관 지원책을 마련했다.

다양한 외국영화를 접하면서 관객들의 시야가 넓어지자 한국 영화제작 풍토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네티즌들의 영화평이 영화 전문가들을 긴장시키는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천편일률, 제목만 다르다는 비아냥을 받았던 한국 영화의 제작자들이 '장르영화'를 표방하며 특성 있는 영화를 기획하여 관객들에게 내놓기 시작했다. 세계영화제에서의 잇따른 개가는 다양성 운동이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룩하고 있다는 확인서 같은 것이었다.

극장 티켓 전산화는 영화계의 오래 된 숙┸눼? 영화의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뤼미에르'는 '티켓 링크사'와 제휴하여 한국 영화관 티켓전산화 사업에 나섰다. 수십 년간 정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던 전국 극장연합회가 작은 꼬맹이 다양성 영화관 '뤼미에르'가 티켓 전산화에 도장을 찍자, 두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다. 철통같았던 금제의 벽이 마침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관객이 다양한 영화를, 다양한 영화관에서, 시간과 좌석을 자유롭게 선택해 관람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화운동에 앞장서 달리던 '뤼미에르'는 많은 내부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영화 창작을 위해 영화 운동을 시작한 나의 정신적, 재정적 능력이 고갈되고 있었던 것이다. 2008년 여름을 끝으로 17년 간 '뤼미에르 극장'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정신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그 임무를 마쳤다.

이제 나도 홀가분하게 영화 창작이라는 내 본연의 길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뤼미에르 극장' 문을 닫으며 영화 '시네마천국'중에서 '시네마천국 극장'이 쓸모없게 되어 부서져 버리는 모습이 떠올라 매우 괴로웠다. 그러나 '뤼미에르' 극장이 놓은 초석 위에서 '워낭소리'도 들려오고 '과속스캔들' 같은 흥행적 스캔들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시네마천국'의 '토토'처럼 행복하게 웃는다.

영화감독 하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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