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퀴즈: 다음 중 ‘출판사 편집자’ 하면 떠오르는 것은?
①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책을 매일 같이 찍어낸다.
② 가가호호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유창한 말솜씨로 백과사전이나 문학 전질을 기어코 판다.
③ 글 쓰고, 번역하고, 디자인하되 돈은 지지리 못 벌어 궁상이다.
④ 혼을 쥐어짜는 저자를 수시로 닦달하고 괴롭힌다.
‘이 따위가 무슨 퀴즈’라며 콧방귀를 뀌었다면 당신은 책 깨나 읽는 사람이다. 아니 세파에 찌들려 활자 냄새 맡을 여유는 없으나 최소한 독서를 갈구하는 축일 게다. 어릴 적부터 사지선다(四枝選多)에 길들여진 터라 답을 꼭 찍고 싶겠지만 4개 항목 중엔 정답이 없다.
각 예시를 든 심리를 분석하면 이렇다. ①은 도서생산을 단순노동으로 여기는 것이고, ②는 부모가 책 읽으라고 강권하던 유년의 추억을 간직한 것이고, ③은 드라마 속 과장된 이미지가 뇌리에 남은 것이고, ④는 작가가 마감에 쫓기는 상황을 가끔 코믹하게 그려내는 만화를 많이 본 탓이다. 기억의 잔상이 오답을 유도한 셈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답이 정답처럼 활개친단다. 실제 위의 예시들은 출판사 편집자들이 주변에서 자신들의 직업을 논할 때 흔히 듣는 말이다. 원고를 교열 및 ‘교정’(校正)하는 작업보다 세간의 그릇된 인식을 ‘교정’(矯正)하는 일이 그들에겐 더 벅차다.
출판사 ‘북하우스’의 김경태(34) 편집장, 박상경(31) 한아름(26) 편집자를 만났다. 젊은 편집자들의 얘기를 목차가 있는 한 권의 책으로 꾸몄다.
프롤로그
지난해 신간 도서의 발행량(대한출판문화협회 집계)은 4만3,099종(만화 포함)이다. 이중 번역도서는 31%다. 총 발행부수는 1억651만5,675부, 종당 평균 발행부수는 2,471부, 가격은 평균 1만2,116원, 책 쪽수는 평균 267쪽이다. 이 복잡한 숫자들의 이면엔 출판사 편집자가 있다.
1장. 그들의 정체는
날 것으로 들어보자. “책을 통해 내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널린 온갖 이야기를 집어내 세상에 전달하는 채널이다.”(박) “사노라면 누군들 사연과 논리가 없겠나, 알리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 그 작은 목소리가 밝은 빛을 보도록 돕는다. 그러면 자연스레 우리의 존재가 드러난다. 밝은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드리워지듯.”(한)
김 편집장이 한마디로 정리한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는 업자지.” 아래보다 위가 현실적이고 명쾌하다.
2장. 이보다 더 전문적일 수 없다.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일단 교정 교열. “국학의 원칙과 출판 실무를 함께 배운다. 무엇보다 우리말 쓰는 감을 배워야 한다. 하루아침에 습득되는 게 아니다.”(박) 디자인과 종이 질, 판형, 독자를 끄는 원고의 구성 능력도 밥벌이 기술에 속한다.
책 속에 저자만 있다고 보면 오산이다. 화가도 있고, 디자이너도 있고, 때론 번역자도 있다. 편집자는 콧대 높은 이들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글발뿐 아니라 말발도 갖춰야 한다”(한)는 얘기.
무한책임도 요구된다. 김 편집장은 “해외 원서를 빨리 낚아채는 기획력과 언어능력뿐 아니라 영화 프로듀서처럼 기획부터 홍보까지 모든 과정에 대해 책임질 각오를 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라이터(저자) 없인 에디터(편집자)도 없다.
3장. 스트레스는 책밖에도 존재한다
애써 만든 책이 안 팔리고, 미쳐 잡지 못한 오자나 편집상 오류(쪽수가 바뀌거나 그림이 잘못 들어가거나 등)가 튀어나올 때, 이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편집자의 스트레스 되겠다.
대부분 기계화할 수 없는 작업이라 야근도 잦다. 그래도 책은 정직하다. 꼼꼼하게만 살피면 틀린 곳을 에누리없이 펼쳐 보여주니까.
정작 편집자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스트레스는 사람이다. “자기 덕분에 책을 낸다는 자부심에 편집자를 홀대하거나 아랫것으로 여기는, 그리고 죽어도 마감시간 안 지키거나 집필 섭외에 응하지 않는 저자들”(한),
“책의 편집방향을 놓고 각을 세워야 하는 공동 작업자들”(박), “예전엔 ‘야, 책에 나왔거든’ 하면 논쟁이 종료됐는데 요즘엔 인터넷 때문에 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독자들”(김)이다.
4장. 세상 모든 잡담과 사연이 책이다
수많은 기획 아이템은 어디서 찾는 걸까. “결국 독자가 원하는 책 소재는 친구나 지인과의 술자리, 무심코 나눈 대화 등 소소한 일상에 널려있다.
‘회사 때려 치우고 바이올린이나 시작해야겠다’는 친구 말에 새로운 아이템이 퍼뜩 떠올랐다. 곧 출간한다.”(박) “TV 신문 등 각종 매체에서 접한 사연 중 느낌이 오는 건 바로 연락한다.”(김)
5장. 사양산업이라도 사양하지 않는다.
종이 매체는 阮씬㎟藪?놓였다고 한다. 그러나 편집자들은 “No”라고 외친다. “인터넷 정보는 신속하지만 깊이가 없어 밑천이 금방 드러난다. 책 속엔 지식과 정보가 오래도록 집적돼있다. 책을 읽는 분위기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박)
“주말에 서점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라. 말과 글을 진중하게 정제한 책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는다.”(한) 무엇보다 편집자들이 있는 한 책은 영원할 것이다.
6장. 밥은 빌어먹고 산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전문직으로 인정 받고 먹고 살만큼 받는다. 진입장벽도 높고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격조 있는 일”(한)이고, “푸대접 받는 제 2외국어 전공자가 우대를 받는 유일한 직업”(박)이며, “매번 신상품을 내야 하는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김) 마음의 양식을 짓는 이들에게 육신의 밥은 절대적 의미는 아니다.
7장. 시작이 궁금하다고
출발은 제 각각이지만 열정은 같다. “대기업에 1년 남짓 다니던 어느날 ‘선배들처럼 늙어가면 안되겠구나’ 싶어 다 털고 흘러온 곳이 출판사다.”(김)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중 출판사 채용공고를 보고 말과 글을 다듬는 연장선이라 여겨 지원했다.”(한) “돈 때문에 버틴 학원강사 일에 신물이 나 책 만지는 일을 찾았다.”(박)
에필로그
서점에 셀 수 없이 꽂힌 책의 대부분은 따사로운 손길 한번 못 탄 채 사라진다. 내용이 제아무리 알차고 유익한들 무엇하리, 선택 받지 못한 책은 그저 폐지일 뿐이다.
편집자가 묻는다. “한해 탄생하는 4만종의 책 중 그대는 몇 권을 읽고 있는가?” 당신이 답할 차례다.
● 한편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기획 및 투고/매주 하루 3시간 이상 기획회의
-저자 섭외 골머리/기획 10개 중 2, 3개만 생존
-목차부터 구성까지 가이드라인 제시/마감 준수는 거의 없다
-원고 요리(가공)/2달 이상 소요
-디자인협의 및 책 꼴 잡아가기
-교정 및 교열/3번 이상, 한달 반 소요
-마케팅 기획
-인쇄 및 출간
-책 수명 다할 때까지 관리/내용 수정사항, 매출 계산 등
고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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