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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독립유공자들/ 병고·생활고·무관심…'獨立의 산 역사'가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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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독립유공자들/ 병고·생활고·무관심…'獨立의 산 역사'가 스러져간다

입력
2009.03.03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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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강동구 둔촌동의 서울보훈병원 본관 병동 8층. 피쉬익 피쉬익, 짧은 백발의 노인이 코에 삽입한 영양공급 튜브 사이로 내는 가는 숨소리만이 적막한 병실을 깨운다.

안춘생(96) 옹이다. 광복군 대장 출신의 독립투사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로 잘 알려진 안 옹은 노환과 알츠하이머병으로 1년 반째 힘겹게 투병하고 있다. 간병인은 "처음엔 독립군 시절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는데 요즘은 입 열기도 힘들어 하신다"고 전했다.

지난해 6월 대통령 방문 이후 정부 측 병문안은 끊겼다. 광복회 회원들이 간간이 찾아올 뿐이다. 편찮은 어머니와 미국에 있는 형제 대신 간호를 도맡고 있는 아들 기선(51)씨는 "(세간의 무관심이) 서운한 거야 말해 뭣하겠나"라며 "다른 애국지사들도 마찬가지니까 내가 잘 모실 수밖에 없다"며 말을 아꼈다.

일제 통치기, 그 암흑의 역사 한복판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애국지사들이 고령과 병고, 후세의 무관심 속에 하나 둘씩 스러져 가고 있다. 소중한 '역사'들이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역사들

1월 말 현재 생존해 있는 애국지사는 205명. 정부까지 나서 숨은 유공자들을 찾고 있지만, 10년 전 382명에 비해 절반 가까이 줄었다. 특히 최근 1년 사이 40명 가까이 세상을 떠났다. 최연소자가 83세라서 유명을 달리하는 지사의 수는 갈수록 늘 것이다.

80, 90대 고령자들에게 노환은 숙명과도 같다. 배종국(85) 옹은 지난해 말 전립선과 방광 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 대신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데, 아침식사 후 약 세 알을 삼키면 종일 몸이 무기력하다. 보훈병원에 가면 치료비가 무료지만, 노구를 이끌고 가기엔 집(서울 동대문구)에서 너무 멀다.

배 옹은 광주서중학교에 다니던 1943년 조선말 금지 지침에 항거하다가 1년 넘게 모진 감옥살이를 했고, 그 공로로 1990년 애족장(건국훈장 5등급)을 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배 옹은 "동지 중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며 "건강이 호전돼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식 단상에 설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대를 잇는 생활고

애국지사에겐 1인당 월 최고 386만 원(건국훈장 1~3등급), 최저 75만 원(대통령표창)의 보상금이 지급된다. 이와 별도로 '품위유지비'라 불리는 예우금이 등급별로 100만~60만 원씩 나온다. 금액만 보고 이들의 노년이 안정적일 거라고 예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독립자금 운반책으로 활약한 공로로 애족장을 받은 이병호(83) 옹. 26일 만난 이 옹의 의료보험 카드엔 부인과 두 아들 부부, 손자까지 부양가족으로 올라 있었다. 장남은 고등학생 때 불의의 사고로 정신장애를 입었고, 둘째는 과로로 쓰러져 10년 넘게 자리보전을 하고 있다. 이 옹은 "독립운동 경력을 내세울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자녀들도 경제 활동을 못하는 터라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받은 연금으로 이 옹은 20년째 아내와 장남의 세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이 옹처럼 개인적 불운이 겹치지 않더라도, 명예로운 애국 전력이 당사자와 후손들에겐 경제적 멍에가 되는 일이 적지 않다. 광복회 차창규 사무총장은 "선대가 불령선인(不逞鮮人ㆍ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으로 몰려 집안이 몰락하면 후손들도 교육을 못 받고 가난의 늪에 빠진다. 그래서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통계에 따르면 독립유공자와 후손 가운데 무직자가 60%를 넘는다. 10%를 약간 넘는 봉급생활자 중엔 경비로 일하는 사람이 많다. 독립유공자유족회 관계자는 "애국지사가 쓰레기장에서 잡일을 하고, 칠순 넘은 의열단원 아들이 찜질방을 전전하는 등 궁핍한 생활을 하는 사례가 부지기수"라며 "독립유공자의 20% 가량을 차지하는 의병 참여자 후손들의 생활이 특히 어렵다"고 전했다.

서운함, 그러나 변치 않는 자긍심

광복회는 지난해 11월17일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참여를 보이코트했다. 순국선열 위패 2,835위가 봉안된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달라는 요구가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대한 항의였다. 광복회 관계자는 "애국지사 후손으로서 품위를 중히 여기는 광복회로선 큰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한승수 총리가 기념식 직후 서대문독립공원을 찾아 새 봉안실 부지 마련을 약속하며 일단락된 이 사건은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의 심중에 담긴 서운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각에선 현재의 보훈정책이 애국지사를 비롯한 고령자들을 잘 배려하지 못한다는 불만도 터져나온다. 차창규 사무총장은 "독립유공자 손자들까지 이미 나이 들어 의료비가 많이 들지만, 의료 혜택은 애국지사 본인과 처에게만 주어지고 이들이 사망한 후에나 후손 한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조국 독립에 기여했다는 애국지사들의 자긍심은 푸르다. 일제 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간 영어살이를 했던 박상유(87) 옹은 "해방 후 별 직업 없이 사회운동을 하느라 5남매를 제대로 못 가르쳤다. 장남만 손수 학비를 벌어 대학을 마쳤을 뿐"이라며 회한을 드러냈다. 그 자신도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지난해엔 전립선 암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불우한 말년을 한탄하지 않았다. 박 옹은 "돈 보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없다. 나라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손자는 이런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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