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기 침체의 한파가 거세다. 우리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던 전통 제조업과 IT산업은 주요 수출 시장인 미국과 유럽의 마이너스 성장에 발목이 잡혔다. 내수와 고용도 얼어붙었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그 규모와 지속시간, 그리고 파급효과에 있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경기침체의 어두운 터널속에서 기업들이 몸집 줄이기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시장 전망이 불투명하거나 단기간의 수익창출과 무관한 예산들은 우선 삭감대상이다. 연구개발(R&D) 분야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신산업 개척을 통한 고용창출이 R&D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R&D 분야의 구조조정은 장기적ㆍ전략적 측면에서 신중하게 검토돼야 한다.
특히 최근의 경기침체는 디지털 기술경제 패러다임의 성장잠재력이 고갈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예고하는 성격이 짙다. 때문에 새롭게 등장할 패러다임에 편승하기 위한 R&D 투자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몇 차례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은 기업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구조조정 와중에도 R&D 분야는 모두 신중하게 접근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R&D를 구조조정의 대상이 아닌 위기극복의 첨병으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이 위기가 끝난 후 그 기업을 시장 전면에 나서게 하는 발판이 되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제조업체인 인텔은 올해 1분기 실적이 88분기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기존 공장에 32나노 제조기술을 구축하기 위해 향후 2년 동안 70억 달러를 쏟아 부을 예정이다. 일본의 캐논도 좋은 사례다. 캐논이 현재 디지털카메라라는 세계적 히트상품으로 눈부신 매출 성장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부터 이어진 일본의 장기 불황속에서도 R&D를 통한 혁신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캐논은 R&D를 단순한 상품 혁신의 차원이 아닌 미래의 성장을 이끄는 동력으로 정의, 경제 위기 속에서도 매출의 7~8%를 R&D에 투자했다. 그 결과 1999년부터 이후 10년간 매출 5.5%, 순이익률 17.9%의 연평균 성장률을 보이며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다.
R&D의 기술 환경 또한 크게 변하고 있다. 특히 최근 융합 패러다임이 뜨면서 이종기술이나 이종 지식간의 결합을 통한 신기술이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연결되고 있다. 원천지식 습득을 위한 기초연구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융합연구의 창출은 기초연구분야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축적되어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또 개방형 기술혁신과 시스템 통합 트렌드도 부각되고 있다. 기술의 복잡성과 제품사이클의 단축, 융복합 경향 확대 등으로 인해 내부자원만으로의 제품 개발은 어려워졌다. 따라서 다양한 기술적 자원에 접근하는 동시에 외부 기술자산을 내부 제품개발과정에 통합할 수 있는 시스템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 과학기술지식과 문화예술, 인문, 역사 등을 연계할 수 있는 창의적인 T자형 인재를 선발하고 육성한다면 중요한 기업자산이 될 것이다.
마침 이와 관련해 지식경제부와 한국산업기술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위기를 기회로: 기업 전략과 R&D'행사가 25일 서울에서 개최됐다. 이 행사는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민간 기업의 R&D 축소가 우려되는 가운데, 민간 R&D 투자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기업의 투자 활성화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련됐다. 주요 컨설팅 회사의 전략개발 노하우와 선진기업들의 성공사례도 제시됐다.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한다. 경기침체의 어두움 속에서 웅크리지 말고 곧 다가올 경기회복의 열매를 가장 먼저, 그리고 폭넓게 누리기 위해 보다 많은 우리 기업들이 현장의 경영전략과 R&D전략 수립에 발벗고 나서기를 기대한다.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재단 기술정책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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