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9시30분 서울 왕십리의 멀티플렉스 CGV.
영화 '숙명'이 종영하고 문이 열리자 마자 관객 77명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5분만에 용변을 해결한 사람들은 다시 다급하게 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치열한 생존경쟁을 방불케 하는 모습. 24일 낮 12시 막을 올린 제1회 '영화 오래 보기' 대회가 연출한 진기한 장면이다.
영화 오래 보기 대회의 참가 신청자는 무려 4만여명. 행사를 주최한 CJ CGV는 이들 중 독특하거나 절실한 사연을 가진 참가자 300명을 선정했고, 최종적으로 239명이 대회에 참가했다.
참가자들의 사연은 다종다양하다. 두 차례나 창업에 실패해 가족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40대 가장에서부터, 이민에 실패한 뒤 귀국해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 참가했다는 사람까지, 각오들이 남달랐다. 그러나 한국 신기록(66시간 41분 56초) 수립과 300만원 상금 획득이라는 목표는 매한가지.
행사 진행요원들은 극장 안에 설치된 27대의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참가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5초 이상 졸거나 휴대폰을 사용하는 참가자 또는 커피를 마시는 사람 등은 지체 없이 퇴장 당했다.
졸음의 첫 희생자는 의외로 빨리 나왔다. 대회 시작 54분 52초 만에 대학생 1명이 극장 밖으로 쫓겨나왔다. "전날 학과 오리엔테이션에서 쌓인 피로가 치명타였다"는 게 이 탈락자의 변.
영화 한 편 한 편이 종영할수록 탈락자의 수는 2명, 3명, 5명 등으로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행사 시작 20시간이 넘어서면서 탈락자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25일 아침 6시38분부터 상영한 '강철중:공공의 적 1-1'을 보다가 잠의 수렁에 빠진 참가자들은 무려 29명이었다.
영화 상영 편수가 늘어나면서 탈락 판정을 받은 참가자들의 항의 시간과 강도도 덩달아 길어지고 높아졌다. 영화를 보지 않고 인쇄물을 읽다가 탈락한 한 참가자는 "한 번도 졸지 않고 30시간을 버텼는데 너무 억울하다"며 스태프에게 30분간 항의하는 작은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주최측은 "영화 오래 보기 대회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는 행동은 탈락의 주요 사유에 해당한다"며 이 참가자를 끝내 돌려보냈다.
졸음과의 싸움을 위해 참가자들이 준비한 '무기'도 가지가지였다. 껌은 보편적인 준비물. 적지않은 참가자들이 입을 오물거리며 졸음을 쫓았다. 매운맛 사탕으로 기록 도전에 나선 참가자들도 있었다. 영화가 너무 좋아 참가했다는 직장인 이병형(35)씨는 영화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매번 양치질을 하며 졸음에 맞섰다.
이러저러한 졸음 퇴치책을 준비해 왔다지만 역시 최고의 졸음 방지법은 영화를 즐기는 것. 참가자 중 최고령 도전자인 권복순(47)씨는 때론 손뼉을 치고, 때론 눈물을 닦아내며 57시간 넘게 스크린에 흠뻑 빠진 채 나이를 잊은 선전을 펼쳤다.
25일 오후 8시 50분쯤, 스태프들을 아연 긴장케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잔인한 장면에 놀란 대학생 허강(21)씨가 호흡 곤란을 호소하며 극장을 뛰쳐나왔기 때문. 비상대기 중이던 의료진이 긴급하게 그의 혈압과 심장박동을 측정했다.
"혈압은 정상입니다"는 간호사의 말에 스태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시를 준비 중이라는 허씨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 나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보고 싶었다"며 "목표했던 24시간을 넘겼지만 생각지도 않던 일 때문에 탈락해 아쉽다"며 집으로 향했다.
뜻하지 않은 집안 일로 기록 도전을 접어야 했던 이도 있었다. 30시간을 넘게 버틴 김강현(27)씨는 쉬는 시간에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짐을 꾸려야 했다.
대회는 27일 오전 8시 7분 막을 내렸다. 대학원생 이수민(28)씨와 대학생 이상훈(26)씨가 68시간 7분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며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두 사람이 본 영화는 총 35편. 더 이상의 영화 보기는 무리라는 의료진의 만류에 따른 끝맺음이었다. 우승자들은 1, 2등 상금을 합친 500만원의 절반인 250만원씩을 각각 받았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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