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이 길고 긴 고민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일부 경제법안을 직권상정하기로 결심했다. 지난 연말 한나라당의 집요한 요구에도 쟁점법안 직권상정을 끝내 거부했던 김 의장이 2월 임시국회 회기를 며칠 앞두고 그토록 꺼리던 직권상정 카드를 꺼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26일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말도 아꼈다.
김 의장은 이날 기자에게 갈라지고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맞게 됐다"고 했다. 직권상정 여부를 묻자 "지난 연말과는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아니냐"는 답이 돌아왔다. 직권상정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김 의장은 지난 연초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직권상정하려면 국민을 위한다는 내용적 정당성과 민주적 절차를 거쳤다는 절차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따라서 김 의장의 '상황변경론'은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내용적 정당성, 연말 이후 2개월의 시간이 흘러 절차적 정당성이 확보된 법안들이 있다는 의미다. 의장실 관계자들도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말했다. 아울러 친정인 한나라당의 끈질긴 직권상정 요구를 마냥 외면하기도 어려웠을 법하다.
그렇다고 모든 법안들을 직권상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김 의장은 숙성 법안들만 선별해 직권상정하겠다는 것이다.
김 의장이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도 '선별 직권상정'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성명서에서 "이미 심의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는데도 대화와 타협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은 사안이라면 국회의장은 이를 처리해야 할 권한과 책임이 있다"면서 "해당 상임위가 27일까지 민생과 경제 관련 법안 심사를 완료해달라"고 촉구했다.
따라서 직권상정 대상 법안은 일단 정부여당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경제 법안들로 압축된다. 출총제 폐지 관련 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산분리 완화를 담은 은행법 및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 국가균형발전특별법 개정안 등 6,7개가 대상인 것으로 전해졌다. 의장실 관계자는 "출총제 폐지 등 경제 법안의 경우 여야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논의 과정을 거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의장은 최대 쟁점법안이자 여권 핵심부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송법 등 미디어 관련 법안들은 직권상정 대상에서 제외한 듯 하다. 아직 여야 간에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국민 지지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야가 내부적으로 4월 처리로 의견을 모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도 제외했다. 김 의장의 한 측근은 "미디어 법안은 숙성이 덜 됐고, FTA 비준안도 상대국이 있는데 여야 합의 없이 처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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