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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인도·네팔 불교성지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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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인도·네팔 불교성지 순례

입력
2009.03.0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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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석가모니 부처는 유언으로 이 말을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조계종이 소의경전인 '금강경' 표준본을 편찬하면서 추진한 인도ㆍ네팔 성지순례단이 찾은 슈라바스티, 룸비니, 쿠시나가라 등 부처의 발자취가 서린 땅은 그가 설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가르침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장적 스님과 조계사 부주지 토진 스님이 이끄는 순례단은 지난 12일 인천공항을 떠나 인도 수도 델리를 거쳐 이틀 만에야 첫 순례지인 슈라바스티에 도착했다.

■ 슈라바스티 /전법의 중심지

슈라바스티는 부처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절인 기원정사(祇園精舍ㆍ제타와나)가 있었던 곳으로 그의 전법 활동의 중심지였다. 당시 코살라국의 부자였던 수닷타 장자가 기증한 기원정사에서 부처는 24안거를 보냈다고 한다.

기원정사 남문에 들어서니 얕은 구릉에 부처의 상수제자 사리불과 아들 라훌라의 입적 후에 세운 벽돌조 스투파(탑), 비구들이 수행했던 승방 등의 유적이 순례객들을 맞는다.

제자 아난다의 청으로 보드가야에서 보리수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는 '아난다의 보리수'를 지나면 부처가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지는 코삼바쿠티가 눈에 들어온다. 그 동쪽에 부처가 경행(經行ㆍ걸으면서 하는 수행)을 했던 터에 쌓아둔 벽돌 테라스가 있다.

조금 더 가니 중국 현장 스님의 인도 기행문 <대당서역기> 에 전단향 불상이 모셔져 있던 것으로 기록된 간다쿠티(香殿) 터가 나온다. 먼저 도착한 포항 죽림사 주지 종문 스님과 신자들을 비롯해 미얀마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이 꽃을 놓고 예불을 하고 있다.

순례단은 이 곳에서 외국인 스님들과 함께 표준 금강경 고불식을 가졌다. 장적 스님은 "부처님이 금강경을 설하신 도량에서 표준 금강경 편찬 사실을 고하고 열심히 수행 정진할 것을 다짐하며 모두 다 성불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부처는 이 곳에서 현재 전하는 불경의 3분의 2 가량을 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스님들이 출가 후 불교 교리를 익히는 강원에서 배우는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의 무대가 바로 기원정사다.

슈라바스티는 불경에 나오는 많은 일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희대의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부처가 교화한 곳도 이 곳이다. 스승의 잘못된 가르침을 듣고 100명의 사람 손가락뼈로 목걸이를 만들기 위해 99명을 죽인 앙굴리말라.

그가 마지막으로 부처를 보고 달려들었으나 아무리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걸음을 멈추어라"고 외치자, 부처는 "나는 멈추었는데, 네가 멈추질 못하고 있구나"라는 말로 악행을 멈추지 않는 그의 마음을 지적해 마음을 열게 했다.

기원정사에서 걸어서 탁발을 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위성터 안에는 앙굴리말라 스투파와 수닷타 장자 스투파가 마주보고 서 있다. 벽돌로 쌓은 스투파는 죽은 이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곳이지만 피라미드나 큰 저택처럼 규모가 크다. 수학여행 온 인도 여중생들이 모여있는 앙굴리말라 스투파 한 쪽에서는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두 스투파의 복원을 지휘하는 현장 감독은 2년 전 복원작업이 시작됐고 현장에서 나온 벽돌로 그대로 복원하는데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다고 전해준다.

순례단은 끝없이 펼쳐지는 유채와 밀밭을 지나 국경을 넘어 네팔 룸비니로 향했다. 자욱한 아침 안개를 헤치고 찾은 곳은 부처의 어머니 먀야 부인이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친정으로 가는 길에 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싯다르타를 낳았다는 곳에 지어진 마야데비사원.

기원전 250년 아쇼카 대왕이 세운 석주가 머리 부분이 유실되고 군데군데 때가 묻긴 했지만 이곳이 부처의 탄생지임을 말해준다. 먀야부인이 목욕했다는 연못은 일본 불자들의 지원으로 시멘트로 단장됐으나 자연스럽지가 않다고 한 스님이 지적한다.

■ 쿠시나가라/법을 보는 자가 나를 보는 자다

다시 국경을 넘어 향한 곳은 부처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라. 깨달음을 얻은 후 45년간 걸어다니며 진리의 가르침을 전한 부처는 바이샬리의 벨루바 마을에서 마지막 안거를 보내기 전 자신의 열반을 예고한다.

"아난다야. 내 몸은 이미 낡아서 나의 나그네길은 벌써 막바지에 이르렀다. 내 나이 지금 80에 들어 형상이 썩은 수레와 같으니 이제 더 굳고 강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아난다야, 너는 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바이샬리를 떠나 쿠시나가라로 마지막 여행길에 오른 부처는 파바 마을에 사는 춘다로부터 수크라 맛따바(돼지고기로 추정)라 불리는 요리를 공양 받고 붉은 피를 쏟으며 심한 통증을 겪었다.

파바 마을을 떠나 쿠시나가라로 가는 도중에 25번이나 휴식을 취한 부처는 히라야바티강을 건너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고요히 누워 열반에 들었다.

"부처는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상한 돼지고기를 먹고 피를 쏟고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다만 부처는 우리가 못 보는 진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순례 중 만난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이 부처의 마지막 길을 설명해주었다.

부처의 유해를 화장한 다비장터에 세워진 라마브하르 스투파를 먼저 찾았다. 부처의 유해는 열반 7일 후 이곳에서 불태워졌으며 그 사리는 8개 왕국에 분배됐다. 순례단은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3번 탑을 돌았다.

부처가 열반한 그 곳에는 지금 열반사가 세워져 있고, 그 때처럼 두 그루의 사라나무가 심겨져 있다. 다른 유적지에 비해 비교적 잘 단장돼 있지만 이슬람ㆍ힌두교 신자들인 동네 주민들에게는 공휴일에 도시락을 싸 들고 와서 노는 놀이터나 다름없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스님과 불자들이 길이 6.1m의 열반상 앞에서 입을 다무는 열반사 안에는 경건함이 넘쳐흐른다.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면 우리는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아난다야, 여래가 열반에 든 것을 보고 정법(正法)이 끊겼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 비구들을 위하여 계율을 정하고 법을 설했다. 이제 그것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는 것이다."

부처와 수많은 제자들, 그를 후원했던 왕과 귀족, 부호들은 가고 없고 그 옛날 번성했던 인도 불교의 현장들도 오래 전 폐허가 돼 지금은 벽돌더미만 남아있지만 부처의 가르침만은 변하지 않고 전해져 오고 있다.

쿠시나가라(인도) 글·사진=남경욱 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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