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서울서부고용종합지원센터. 오전 9시30분부터 업무가 시작되지만, 의자 120여개가 놓인 실업급여 창구 앞 대기실은 9시 무렵이면 빈 자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꾸역꾸역 몰려든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고 엉거주춤 서있을 만한 곳을 찾는 사이, 대학생 인턴 2명이 안내 업무로 분주하다. 이들은 방문자가 급증한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에 배치됐다.
9시30분, 9개 상담 창구의 번호판이 일제히 켜지면서 오전 상담이 시작됐다. 실직자들은 상담원에게 그간의 구직활동 내역을 제출하고 취업에 관한 조언을 들었다. 취업 노력이 충분했다고 인정되면 다음날 통장으로 실업급여가 들어온다.
대기 시간은 30분을 쉬이 넘지만, 상담은 3분도 채 안 걸린다. 김보경 실업인정팀장은 "원래 근로 계약이 끝나는 11월부터 2월까진 실업급여 수급자가 늘어나는데다, 지난해보다 방문객이 30%쯤 증가해 상담 시간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센터를 찾은 김모(55)씨는 구직 증거로 한 구청에 낸 공원관리 계약직 지원서 사본을 들고 왔다. 김씨는 "47명 뽑는데 300명 넘게 와서 떨어졌다. 요즘 다 그렇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수저 공장을 운영했던 김씨는 외환위기의 서슬에 회사 문을 닫았다. 이후 몇 년 째 10개월은 구청 계약직으로, 두세 달은 실업급여로 근근이 생계를 잇고 있다. 그는 "집사람이 대학도 나온 여자인데, 못난 남편 때문에 아기 돌보는 일을 시작했다. 불경기가 3, 4년은 더 갈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상담은 보통 마감시간인 11시를 넘겨 정오까지 이어진다. 서부센터는 마포ㆍ서대문ㆍ은평ㆍ용산구를 관할하는데, 지난해 하루 평균 102명이던 신규 급여 신청자가 지난달엔 최고 199명까지 치솟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실직자들의 행렬, 실업자 100만 명 시대를 목전에 둔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다.
센터를 찾는 실직자들 가운데는 아주머니들이 꽤 많다. 대부분 청소 용역회사와의 계약이 끝난 이들이다. 그보다 훨씬 많은 건 일용직 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중년 남성들이다.
건설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이들은 일할 현장을 잃어버렸다. 김진용 수급자격팀장은 "정규직, 계약직에 비해 고용 상태가 취약한 일용직 근로자들의 실업 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난생 처음 실업급여를 신청했다는 목수 정모(47)씨는 "이렇게 오래 놀아보긴 처음"이라고 말했다. 아파트 외벽 공사를 하는 석재 기능공 최모(51)씨도 "하도 일이 없다 보니 13만~15만원 하던 기능공 일당이 2만원쯤 떨어졌다"고 전했다. 돈 들어갈 데도 많은데 기약 없는 실업 상태에 빠진 이들 가장(家長)들은 참담한 표정이었다.
젊은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김모(28)씨의 첫 직장은 석 달 전 입사 13개월만에 부도를 맞았다. 10곳 넘는 직장에 지원서를 넣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급여 수령일이 돌아왔다. 김씨는 "요즘은 신입보다 경력직을 선호하는데 1년 경력으론 어림도 없다"며 "회사가 조금만 더 버텨줬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며 말을 흐렸다.
지난 연말 무역회사에서 정리해고 된 최모(28ㆍ여)씨는 "11월쯤부터 주문이 절반 이하로 줄어서 사무실에선 '바쁘면 간첩'이란 농담까지 돌았다"며 쓰게 웃었다. 텔레마케터로 일했던 정모(31ㆍ여)씨는 "별다른 재주가 없어 하던 일을 계속하려 하는데, 예전과 달리 업무와 무관한 '스펙'(취업자격)을 많이 따져 힘들다"고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돕는 부서도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외국인력팀 권경남씨는 "하루 40~50명 정도 찾아오던 외국인 실업자 수가 지난해 말부터 70~80명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에겐 고용보험 강제 가입이 적용되지 않아 실직할 경우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다. 2년 반 동안 일한 김포의 한 공장에서 지난달 해고된 삼파티(26ㆍ스리랑카)씨는 "한국이 어려운 거 잘 안다"면서도 "부양할 가족이 일곱이다. 적은 월급이라도 좋으니 일할 데가 꼭 있었으면 한다"고 절박하게 말했다.
오전만큼은 아니지만, 2시부터 시작되는 오후 상담에도 대기 번호표 숫자는 쑥쑥 올라간다. 원양 화물선 갑판수인 진모(49)씨는 "지난해 11월 이후 배를 못 탔다. 달러로 급여를 받는 직종이다 보니, 환율이 오르면서 한국 선원 대신 임금이 싼 조선족이나 동남아인들을 채용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령 제한 없나요? 보수가 얼마요? 접수 중입니까?" 고령자 휴게실에서 구인광고를 살피며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는 길모(63)씨. 가방엔 20장쯤 되는 이력서 복사본과 각 지역 생활정보지가 가지런히 들어있다.
"아파트 경비일 구하려고 두 달 동안 수백 곳을 찾아다녔다"는 그는 양말까지 벗고 물집투성이 발바닥을 보여줬다. 이어 "많은 걸 원하는 것도 아니고, 할멈이랑 먹고 살 만큼만 원할 뿐인데 그것마저 벌 수가 없다"는 장탄식을 남기고 센터를 빠져나갔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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