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도 일생이 있다. 태어나서 자라고 죽는다. 1,500년 묵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체계도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붕괴되었고, 200년 이상을 호령하던 뉴턴 역학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으로 뒤집혔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라면 150년 전 <종의 기원> 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다윈의 진화론도 언젠가는 생을 마감할 것이다. 종의>
현재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은 건장한 150세 청년이다. 하지만 100년 전에도 이랬을까? 교과서에 충실한 사람들은 <종의 기원> 이 출간되고 나서 다윈의 진화론이 승승장구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진화론의 역사에는 깊은 굴곡이 있었다. 종의>
■ '자연선택'에 대한 격렬한 비판
자연선택 개념은 다윈의 독창적인 생각이었던 만큼 비판도 많았다. '자연선택'이란 개체가 자신이 가진 변이 때문에 다른 개체들에 비해 생존과 번식에 더 유리해져 다음 세대에 더 많은 자손을 남기는 과정이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무작위적인 변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 메커니즘만으로는 기막히게 환경에 적응한 사례들을 잘 설명할 수 없다고 불평했다.
이러한 비판의 포문을 먼저 연 것이 우리가 흔히 '용불용설'이라고 부르는 라마르크의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종의 기원> 을 읽다 보면 다윈마저도 이를 상당부분 받아들이고 있어 놀랄 때가 있는데, 이런 경향은 <종의 기원> 이 판을 거듭할수록 더욱 심해졌다. 종의> 종의>
20세기 초 독일의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이 여러 세대에 걸쳐 쥐의 꼬리를 잘랐지만 다음 세대의 꼬리가 짧아지지 않았다(즉 후천적으로 변형된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전까지, 획득형질의 유전과 자연선택은 '적과의 동침'까지는 아니어도 '불안한 동거'를 이루고 있었다.
'정향(定向)진화설'도 자연선택 이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정향진화설은 생명이 내재적으로 더 완벽해지려는 쪽으로 변화하는 성향을 갖는다는 가설이다.
라마르크주의가 생명이 필요에 따라 유리한 형질을 쟁취해 진화를 이룬다는 시각이라면 정향진화설은 우수한 종을 향해 진화의 방향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이 모든 비판은 자연선택의 창조적 힘을 믿지 못한 결과였다.
게다가 다윈은 유전 현상에 대해 입증되지 않은 '범생설'과 '혼합유전설'을 믿고 있었다. 범생설이란 몸 속 세포들이 '제뮬'이라는 작은 입자를 만들어 유전가능한 형질을 자손에게 전달한다는 것이고, 혼합유전설이란 유전물질이 액체처럼 섞여 전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에 따르면 개체들 사이의 차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어 결국 종 분화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다윈으로서도 심각한 문제였다. 가령 흰 물감과 검은 물감을 섞으면 회색만 나올 뿐 회색끼리 섞어서 흰 색과 검은 색이 나올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다윈은 1880년에 과학전문지 '네이처'의 편집장에게 격앙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편지한다. "나는 진화가 자연선택에만 의존한다는 주장을 결코 한 적이 없소이다." 안쓰러운 광경이다. 영국의 진화론 역사가인 피터 보울러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를 '다윈주의의 쇠퇴기'라고까지 부른다.
■ 유전학의 등장과 다윈의 부활
추락하는 다윈을 구원한 이는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유전학 분야에서 나왔다. 유전학의 아버지 그레고어 멘델. 그의 역사적인 논문 '식물 교잡에 관한 실험'은 1866년에 발표되었지만 1900년 유전학자 휘고 드 브리스에 의해 재발견될 때까지는 존재감이 없었다.
유명한 멘델의 완두 실험이 빛을 본 후, 다윈이 쩔쩔맸던 유전 문제도 돌파구를 찾았다. 멘델은 입자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유전물질이 다음 세대에 독립적으로 유전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의 이론은 완두의 껍질모양처럼 명확히 구별되는 형질에만 적용된다고 비판받는다. 이에 현대 통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날드 피셔는 1918년 사람의 키와 같은 연속적인 변이들도 멘델의 유전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통계적으로 보였다. 영국의 유전학자 J B S 홀데인은 후추나방 색깔의 진화를 관찰함으로써 피셔의 예측모형을 경험적으로도 입증했다.
이로써 수많은 연속적 변이들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의 힘이 검증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 개체의 유전자 변이가 아니라 집단에서 유전자의 빈도가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초점을 맞춘 '개체군 유전학'이 탄생했다. '다윈 부활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다.
다윈은 유전학과 진화론을 종합한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와 에른스트 마이어 등에 의해 새 힘을 얻었다. 고생물학자 조지 게이로드 심슨과 식물학자 레드야드 스테빈즈는 각각 화석연구와 식물연구를 통해 그 어떤 이론보다 자연선택 이론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급기야 1942년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다윈의 불독'을 자처했던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이며 <멋진 신세계>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동생)는 <진화: 근대적 종합> 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의 핑크 무드를 전했다. 진화:> 멋진>
■ DNA구조 규명과 새로운 생물학의 발전
되돌아보면 '종합'이라는 표현은 좀 민망하다. 너무 일찍 터뜨린 샴페인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의 DNA 이중나선구조 발견이 1953년에야 일어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 이후에야 유전자의 실체를 바로 알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고전의 반열에 오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도 따지고 보면 다윈과 왓슨 사이에서 태어난 하이브리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도킨스는 분자생물학의 세례를 받아 '사회적 행동의 유전적 진화'(1964)라는 논문에서 이타성의 진화를 설명한 윌리엄 해밀턴의 견해를 창조적으로 재구성한 커뮤니케이터였다. 이기적>
도킨스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동물의 협동 행동들이 유전자의 눈높이에서는 이기적일 수 있음을 극적으로 보여주었고, 우리 인간도 결국 '유전자의 운반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다윈의 생명관을 도발적으로 각색했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유기체가 아니라 유전자다.
하버드대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1975)은 동물행동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윌슨의 후예들인 행동생태 연구자들은 개체들끼리 유전적으로 얼마나 가깝고 먼지를 밝혀주는 DNA 분석을 비롯한 온갖 유전학적 기법들을 적극 활용한다. 염기서열을 해독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형태만 보고 생물종을 분류했던 과거의 분류학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사회생물학>
발생학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사실 '근대적 종합'이나 '신다윈주의'로 불리는 1940년대 진화론의 발전은 반쪽짜리다. 이 때만 해도 발생학은 막 등장한 유전학의 막강한 위세에 밀려 통합의 언저리에도 끼지 못했다. 신다윈주의자들은 하나의 수정체가 어떻게 성체로 발생하는지, 그리고 그런 발생 메커니즘 자체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성체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수정된 세포가 하나의 생명체가 되는 발생 메커니즘이야말로 변이를 만들어내는 핵심이었는데도 오히려 블랙박스처럼 취급되었다.
변화의 바람은, 발생을 조절하는 유전자들의 정체가 속속 밝혀지기 시작한 1980년대에 불어닥쳤다. 드디어 발생이라는 블랙박스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예컨대 분자유전학의 발전으로 초파리의 체절 형성을 조절하는 혹스 유전자들이 발견되더니, 그 유전자들이 포유류의 척추와 골격 형성에도 똑같이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같은 유전자가 아주 동떨어진 종에서도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들은 발생과 진화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고 연구자들은 여기에 '이보디보'(진화발생학ㆍevolutionary development를 결합시킨 조어)라는 예쁜 이름을 붙여주었다.
현재 진화론은 생명현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이론틀을 제공하며, 생물학의 모든 분야는 진화론을 통해 통섭되고 새 장이 열리고 있다. <종의 기원> 에서 이보디보까지, 진화론은 현재진행형이다. 종의>
장대익·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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