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버스를 타고/ 오늘도 문득 내려가면/ 너는 거기에 있구나/ 옛날처럼 내 상처/ 다스리며 말없이 서 있구나/ 가을 해 부서지는 길거리에/ 사금파리 울음 감추고/ 너는 나를 맞는구나' (이승훈 시 '고향'에서)
시인 이승훈씨에게 고향 춘천은 일종의 부채감에 사로잡히게 하는 공간이다. 그는 고향을 떠올리면 '남춘천 쪽 들판에 부우연 먼지가 일던 봄날 저녁'과 집안에서 앓고 계시던 부친이 떠오른다고 했다. 고교까지 고향에서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에서 직장을 얻어 10년 간 일했지만, 다시 찾은 '안개 도시'에서 그가 느낀 것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 이었다고 한다. 그 상처가 곧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자극한 공간이었음을 그는 감추지 않는다. "다시 생각하면 고향이 나를 괴롭힌게 아니라 내가 고향을 괴롭힌 것 같다. 이제 춘천은 가을 산길에 피어있는 한 송이 들국화 같다."
이씨를 비롯해 시인 유안진 신달자 박남철 이문재씨, 소설가 전상국 한수산 조성기 오정희 최수철 함정임씨 등 춘천 출신이거나 혹은 춘천과 인연을 가진 문인 29명이 함께 쓴 산문집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 (문학동네 발행)이 나왔다. 어느 한 도시를 주제로 이만한 문인들이 함께 글을 쓴 경우는 흔치않다. '춘천'이라는 지역이 가진, 특별한 정서 때문일 것이다. 춘천,>
책은 '문인 29인의 춘천 연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들이 가진 춘천의 추억에는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아픔과 슬픔이 더 녹아들어 있지만, 그들이 털어놓는 춘천과의 인연은 곧 그들의 문학적 자산이다. 사랑노래일 수밖에 없다.
29인의 문인 중 유안진 오정희 이승훈 한명희 박남철 박찬일 이문재씨는 2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저마다의 춘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서울 동북부 지역에서 대학을 다녔던 시인 이문재씨는 군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위해 춘천의 한 카페를 찾았다가 하루 만에 퇴짜를 맞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카페를 나와 소양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무연히 바라보던 그 순간은 시인에게 이렇게 각인됐다. "내 스물세 살이 강가에 앉았다. 막연한 미래가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설가 조성기씨가 지금껏 운전면허가 없는 사연도 춘천에 얽혀있다. 춘천 외곽의 한 부대에서 군종병으로 근무했던 그는 어느날 군목의 오토바이를 타고, 평소 꿈꾸던 '춘천가도'를 달려보는 꿈을 실현했다. 그는 운전 미숙으로 4차선 아스팔트 도로에 나동그라져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씨는 부지런히 걸어다니는 습관은 춘천이 자신의 인생에 준 선물이라고 돌아보았다.
경북 안동 출신의 시인 유안진씨는 1970년대 시간강사 시절 교사 연수를 위해 몇 차례 춘천을 찾은 경험이 전부지만 2007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라는 시로 다시 인연을 맺었다. 지역적 특성이나 유교적 덕목 등을 근거로 작명을 하는 다른 지역의 지명들과 달리 '봄내'라는 뜻의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에서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라는 구절을 얻었다고 한다. 유씨는 "언어를 다루는 시인으로서 나는 춘천보다 더 기막힌 이름의 '그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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