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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추기경의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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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추기경의 불면증

입력
2009.02.2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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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본 영화 '굿바이'가 처음으로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일본 열도가 들썩거렸다고 한다. 거기다 단편애니메이션상까지 한꺼번에 아카데미상을 두 개나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개봉한 '굿바이'는 여행에 대한 영화다. 그 여행은 인생의 마지막 여행, 죽음이다. 악단이 해체돼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가 된 첼리스트가 여행 가이드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은 그냥 여행사가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하는 이들을 배웅하는, 죽은 이들의 시신을 염하고 관에 안치하는 납관(納棺) 일을 하는 곳이었다.

그 일에서 인생과 생명과 행복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젊은이의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이번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 후보로 올랐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기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어가는 한 남자의 삶, 거꾸로 된 인생을 상상한 원작소설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심중에는 죽음에 대한 집요한 성찰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주 한 사람의 죽음이 한국 사회를 깊숙이 뒤흔들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다. 고인의 5일장이 치러지고 나자 마치 언제 그랬나 싶게 다시 하루하루가 버거운 일상으로 되돌아왔지만 한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어떤 거대한 정신적 체험을 한 듯하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뵙기 위해 명동성당을 돌아 몇 km나 이어졌던 40만여명의 추모 행렬은 호들갑스런 언론의 표현처럼 '기적'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원로 문인의 표현대로 '아름다움'인 것은 분명했다.

그들이 다 천주교 신자였을 리는 없다. 오히려 종교가 없거나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행렬 속에서 조문 순서를 기다리며 "사랑하세요"를 유언으로 남긴 김 추기경의 죽음, 그의 생애와 얽혀있던 한국의 현대사, 그리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 돌이켜보았을 그 성찰의 시간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 그들이 저도 모르게 흘렸을 눈물, 남모르게 느꼈을 부끄러움이야말로 고인이 죽음으로써 일깨워준 가장 근원적인 종교적 체험이다.

더러 김 추기경의 말년의 행적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도 나왔다. 그러나 한 인간의 수명을 역사의 길이에 댈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도 그의 삶의 몫이었을 뿐이다. 스스로를 '바보'라고 했던 고인이 삶 자체로 숨김없이 보여주었듯, 그는 신의 대리인인 추기경인 동시에 한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더 추앙받았다. 고인이 우리 사회의 큰어른 노릇을 해야 했던 1960년대말부터 내내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죽음 이후에 들었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젊었을 때 보들레르의 시를 줄줄 외웠다는 김 추기경의 회고록을 보면 2007년의 한 인터뷰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시로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꼽았다. 그리고 말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서시(序詩)'를 좋아하지만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 했다."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시위대를 쫓아온 경찰을 향해 "먼저 나를 밟고 가라"고 했던 그의 기개보다, '서시'를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했다는 그의 고백에 더 머리가 숙여진다. '굿바이'의 주인공이 시신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염하는 장면처럼, 김 추기경의 불면증과 고백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진다.

하종오 문화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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