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치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가정 불화가 자신의 인생 나침반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을 줄은. 그도 그럴 것이, 가정 불화로 생긴 '결손가정'이라는 꼬리표를 받아들이기엔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렸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한창 뛰어 놀 10살배기였으니 말이다.
김경아(22ㆍ가명ㆍ경기 구리시)양. 그의 뇌리에 남겨진 학창시절 추억은 별로 없다. 굳이 남아 있는 게 있다면, 숫한 가출과 이른바 '학교'로 불리는 소년원을 들락날락 하기 바빴던 어두운 기억 뿐이다.
"언제부턴가 늘 혼자였어요. 아무리 둘러봐도 따뜻한 손을 내밀어줄 그 누구도 제 곁엔 없었어요." 어렵게 응한 인터뷰에서 그가 멋쩍은 웃음과 함께 더듬어 낸 어릴 적 기억은 '외로움'이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참 빨리 흘렀네요. 벌써 22살이 됐으니." 씁쓸한 미소가 뺨으로 퍼져 나가는 순간, 그의 두 눈은 시계 추를 거꾸로 돌리려는 듯 소리 없이 감겼다.
여느 집처럼 평온한 삶을 이어온 그의 가족에게 불행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무렵. 당시까지만 해도 작은 핸드백 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풍족하진 않았지만 어머니와 남동생 등 네 식구는 비교적 여유롭게 지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저지른 한 순간의 실수가 단란했던 그의 가족을 풍랑 속으로 몰아넣었다. 부모가 이혼하면서 그와 남동생은 시골 친할머니 집으로 보내졌지만, '결손가정'이라는 족쇄는 그를 끝없이 괴롭혔다. 마치 어둠의 터널 속으로 밀어 넣어진 기분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싫었어요.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마땅히 할 이야기도 별로 없었고…." 활발했던 성격은 점점 거칠게 변해갔다. 1년 뒤 새 어머니가 들어오면서 가족들이 다시 모여 경기 광주시에 터를 잡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뒷골목을 전전하던 중학교 1학년 때 드디어 사건이 터졌다. 호기심에 중국집 카운터에서 지갑을 슬쩍했다가 붙잡혀 소년원에 수감된 것이다. 6개월 후 출소했지만, 그를 따뜻하게 반겨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스로 가족에게 등을 돌린 채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으로 가출생활을 이어갔지만, 여전히 마음 붙일 곳은 없었다. 결국 또 다시 절도 등을 저지르며 세 차례나 더 소년원 신세를 졌다. 나락까지 떨어진 그가 삶의 희망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라고 했던가. 끝없는 절망과 자괴감으로 자신의 존재감마저 잃어버린 채 약관의 20대에 막 접어들 무렵, 밑바닥 인생의 물꼬를 돌려 놓은 인물은 뜻밖에도 그의 아버지였다.
출소를 1년6개월 가량 앞두고 있던 2007년 초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아버지는 새 어머니와의 이혼 소식을 전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처음엔 놀랐어요. 늘 냉담한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 시린 무언가가 느껴졌어요." 아버지의 '정'이 가슴 속을 파고 들었던 것일까. 그는 흔들리는 내면 속 자신을 발견했다. '삶을 이렇게 망칠 수는 없어. 이젠 정말 뭔가 달라져야 해.' 그의 인생 전환은 이렇게 다가왔다.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 그 때, 삼성SDS '정보기술(IT) 나눔봉사단'에서 소년원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해온 IT 교육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어요. 평소 공부라면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IT 공부에 점차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어요."
'나 같은 놈은 어차피 해도 안 될 거야'라는 패배주의적 사고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소년원에 있는 다른 친구들이 TV 시청이나 운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자유시간에도 그는 책과의 씨름을 계속했다.
이런 노력은 조금씩 결실로 돌아왔다. 불과 1년 반 사이에 국가공인 정보처리기능사와 정보기기운용기능사를 포함해 워드프로세서1ㆍ2ㆍ3급, 아래아한글, 파워포인트, PC활용능력평가3급, e테스트1급(국가공인 정보활용능력 평가) 등의 자격증을 모두 땄다. 메이크업아티스트(3급)와 네일아트(2급) 자격증도 손에 쥐었다.
"경아에겐 남 다른 면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근성이 강했지요. 한번 마음 먹으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으니까요. 자격증도 한 번에 두세 개씩 땄습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선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당시 그를 지도했던 삼성SDS 'IT나눔봉사단'의 최천석 선임은 그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떠올렸다.
지난해 6월 출소한 그는 현재 소년원 선생님 추천으로 서울 영등포의 한 잡화점에서 인터넷 쇼핑몰 등을 관리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대리운전을 하는 아버지와 다시 울타리를 꾸린 그는 요즘 새 세상을 만난 기분이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만, 작은 소좇?하나 있단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IT 정보화 교육 지도사로, 자신처럼 불행한 길을 걸어온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이다.
"'성취감'이라는 열매가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그들은 잘 몰라요. 거기엔 또 다른 세상이 있거든요. 좌절감에 사로잡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친구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걸 이야기 해주고 싶어요."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굵은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삼성SDS 'IT 나눔봉사단'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모토 하에 펼쳐지는 삼성SDS의 사회공헌활동은 각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준다. 그 중심에는 전문 경험을 살려 14년째 정보기술(IT) 정보화 교육을 진행 중인 'IT 나눔봉사단'이 자리잡고 있다.
약 500명 규모로 운영되는 IT 나눔봉사단은 소년원생과 결손가정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정보화 소외계층에게 컴퓨터(PC) 활용 등의 IT 실용화 교육을 진행한다.
또한 IT경진대회 등을 개최, 사회생활에 필요한 각종 자격증 취득을 도와 사회재활교육과 자립을 도모한다. 물질적인 지원도 병행된다. 삼성SDS는 그간 5억원 상당의 PC 1,300여대를 전국 각지의 소년원에 기증했다.
전체 구성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사회공헌활동도 활발하다. 1996년 시작해 올해로 13년째, 매년 창립기념일(4월 15일)에 맞춰 시행해온 '참사랑 나눔의 큰 잔치'가 대표적이다. 삼성SDS는 전 사원들이 근무시간의 1% 이상을 봉사활동에 참여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삼성SDS 가족이라면 누구나 소년ㆍ소녀 가장의 든든한 후원자다. 임직원의 90%가 매월 급여에서 일정 금액을 적립해 소년ㆍ소녀 가장들을 위한 후원금을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전적 후원 뿐만이 아니다. 매월 2~3회씩 소년ㆍ소녀 가정을 직접 방문, 진학문제와 생활지도 등을 통해 그들이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각 사업부별 봉사활동도 활발하다. '농촌봉사활동'은 물론 '소년ㆍ소녀 가장 멘토링', '미아찾기 캠페인', '서울 숲 생태계 가꾸기' 등 다양한 활동으로 지역사회에 실질적인 혜택을 주고 있다.
삼성SDS의 사회공헌활동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해외 소외지역에 PC 및 기타 IT 장비를 지원하는 'SDS 사랑의 IT교실'은 한국기아대책기구와 연계, 현지 아동들에게 양질의 정보화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고 있다.
2004년 몽골을 시발점으로 말레이시아, 파라과이, 타지키스탄, 베트남, 솔로몬군도 등 전 세계 6곳에서 진행됐으며, 각 나라마다 PC 20대와 프린터 2대 등의 기자재를 지원했다.
삼성SDS 인사지원팀 유홍준 상무는 "정보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소외계층에겐 보다 실용적인 IT나눔 봉사활동이 필요하다"며 "임직원들의 IT역량을 토대로 한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따뜻한 디지털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허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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