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다닐 때였다. 공연히 남들 쉬는 일요일에 일찌감치 도서관에 갔다가 아는 얼굴들 둘을 꼬여냈다. 그녀들은 뭔가를 읽고 뭔가를 써야 할 계획이 잔뜩 있었는지 망설였지만 내가 이미 봄바람이 든 걸 말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포기했다.
당시에는 근처 정류장에서 근교를 왕복하는 버스 노선이 몇 개 있었다. 애당초 우리에게 정해진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 아무거나 잡아타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다. 나는 몇 주 전 학교 은행나무 밑에서 주워서 나만 아는 장소의 낙엽 밑에 묻어두었던 은행 봉지를 들고 있었다.
신나게 원 없이 걷고 또 걷고 얘기하며 돌아가는 길에 그날 따라 갑자기 기온이 급전직하해서 승객들이 추워하자 기사님이 선심으로 히터를 틀어주셨다. 기사님 뒤가 명당 자리였다. 왼편 가장자리에 있는 방열기에 발을 대니 뜨뜻했다. 우리는 룰루랄라 쏭닥쏭닥 또 수다를 떨며 가는 참이었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원초적 배설물 냄새 비슷한 그런 것이 차 안을 감돌고 있었다. 서로 두리번거리는데 아뿔싸 내 은행 봉지가 문제의 시발이었다. 아마 막차였을 테니 체면이고 뭐고 간에 내릴 수가 없었다. 얼굴 벌게진 채 그리도 멀게 느껴지는 귀가 길이었다.
안 해 본 사람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은행 껍질 까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약하다. 그런데도 엄마는 힘든 사연을 품은 채 가져온 정성을 생각해서 하루에 몇 알씩 까서 드셨고, 그 중에도 튼실한 놈으로 몇 알 골라서 화분에 심으셨다. 한 세 척 정도로 자랐을 때 집 뒷산에 묻었다고 한다. 그 은행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지금은 청년의 훤칠한 키가 되었다.
지난 초겨울인가 냉장고에 넣어둔 밤에서 싹이 나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방치하다가 버리려는 참에 그 은행 생각이 났다. 똘똘해 보이는 몇 알을 화분에 묻어 두고는 그냥 잊어버렸다. 어느 날 아침에 베란다를 무심코 쳐다보는데 내 눈길이 구석진 곳에 멈추었다. 아이고야, 잎을 제법 몇 개나 이미 틔운 새 생명이 거기에 있었다. 숨이 멎는 듯했다. 게다가 한두 달 새 거의 두 뼘 이상으로 잘 자라난 묘목이 되었으니 봄이 오면 고향을 떠나 어느 산으로 들어가야 할 정도가 되었다.
얼마 전에 얻은 피잣이 깨먹기가 영 쉽지 않다. 망치로 두들기니 속의 알맹이가 부서진다. 이로 깨물어 봐도 온전한 걸 건지기가 어렵다. 중국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해바라기씨나 수박씨를 즐겨 깨먹는 바람에 앞니가 조금 파인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공연히 이나 상하게 만들까 싶어 그냥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이 잣은 또 어떤 외강내유(外剛內柔)한 삶을 펼치게 될 것인가?
우리에겐 참 좋은 간식거리지만 은행도, 밤도, 잣도 다음 세대의 잠재력을 가득 품고 있는 씨앗이기도 하다. 그 두꺼운 껍질을 깨고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상의 힘이 아닐까? 그들은 몇 번이고 거듭 환골탈태하여 아름드리 성장한 나무가 되어 있을 미래의 모습을 떠올리며 신명을 스스로 내고 있는 것만 같다. "힘들다, 힘들다"하면 더 힘들고, "재밌다, 재밌다"하면 정말로 재미있어진다는 자기최면 효과를 생각하게 된다.
놀러 가는 날은 꼭 일찍 깨 부산을 떠는 자신이 여전히 어린애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나왔다. 오늘은 호두를 사러 가볼 참이다. 주름진 방방마다 오롯이 담겨 있을 생명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윤혜린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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