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현상'은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명동성당 일대에서 전국으로, 조문객과 자원봉사자들의 마음 속에서부터 명망가와 지식인, 종교에 무관심한 일반인들에게로 폭넓게 번지고 있다. 그건 단순한 다짐이기도 하고, 즉각적 행동이기도 하며, 장기적인 계획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과 긍정의 힘'을 연료로 자신을 열고 남을 위해 나누며, 잃었던 것을 깨우쳐 사랑을 실천한다는 도도한 흐름으로 모아지고 있다.
대학생과 고등학생 두 딸을 데리고 조문 행렬에 서 있던 이철순(49)씨는 "생전에 추기경님께서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실 때 이주노동자를 한 가족처럼 여기고, 모든 인간을 차별 말고 사랑하라고 하셨다"며 "추기경님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 손을 잡고 명동성당을 찾은 김선욱(10) 어린이는 "추기경님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도와주신 분으로 알고 있다"며 "저도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웃을 향한 고인의 사랑과 나눔은 명동성당 주변 곳곳의 자원봉사 열기로도 이어졌다. 연일 인파가 몰리자 가톨릭기사사도회 소속 개인택시 기사들이 교대로 나와 조문객 진입 및 주변 교통정리를 도왔고, 인근 삼일로창고극장 단원들은 추운 날씨에 3시간 이상 조문 순서를 기다리는 조문객들에게 따뜻한 차를 나눠줬다. 장례기간 중 각 분야에서 1,00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봉사에 나선 것으로 추산된다.
장기 기증 열기도 뜨겁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따르면 추기경 선종 이후 19일까지 나흘 동안 전국에서 800여명이 각막과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다. 운동본부 관계자는 "이는 평소의 10배 이상인 수준"이라고 밝혔다.
명동성당 입구에 마련된 운동본부 현장 접수처에 들른 도진희(40)씨는 "평소에도 관심은 있었지만 행동으로 못 옮겼는데 추기경님 소식에 감동 받아 결심했다"고 말했다. 탤런트 정한용, 가수 장윤정과 서인영, 개그맨 양원경 등 연예인 10여명은 사단법인 한국인체조직지원본부에 각막 및 조직 기증 서약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1989년 서울세계성체대회 때 교계 내외의 뜻을 모아 설립한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 관계자는 "장례가 끝나면 고인의 유지를 살려 정부 및 사회단체들과 사후 장기 기증, 헌혈운동 등을 장려하는 범국민적인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 배규한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차광은 포천중문의대 부총장, 홍사종 숙명여대 교수 등은 고인의 '바보 정신'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을 기획하고 25일 발기인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홍사종 교수는 "지난해 '4만불 국민성공시대, 바보정신을 말하다'라는 세미나를 갖고 물질ㆍ경제 만능주의의 반대편에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추기경님의 '바보 정신'을 사회운동으로 승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며 "고인의 유지를 이어 우리 사회에 '정신의 숨쉬기 운동'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추기경의 모교인 서울 동성고등학교 총동창회도 고인의 나눔정신을 잇기 위해 가칭 '김수환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할 계획이다. 동창회 관계자는 "동문들의 광범위한 동의는 얻었으나 병세가 갑자기 위중해지셔서 고인의 유지를 직접 받지는 못했다"며 "5억원을 장학기금에서 출연해 재단을 설립한 후 점차 활동을 넓혀 유니세프나 월드비전 같은 복지단체로 일궈내고 싶다"고 말했다.
사랑과 나눔의 거센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잇단 경제위기와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우리 사회에는 쓸쓸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던 정신ㆍ가치의 추구가 추기경의 선종을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본다"고 '김수환 현상'을 해석했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명동성당 일대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적의 행렬'은 진정성 있는 인생을 살아온 큰 인물에 대한 경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장인철기자 icj@hk.co.kr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장재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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