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은 본격적인 작품의 밑그림에 불과하다는 인식으로 인해 오랫동안 홀대를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드로잉을 바라보는 시선은 많이 달라졌다. 작가들의 근원적인 감성 표현과 창작 의지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드로잉만의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예비적 스케치가 아닌 독립적인 표현 방법으로 드로잉을 선택하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서울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모셔널 드로잉'(Emotional Drawing) 전은 드로잉의 매력을 새롭게 느껴볼 수 있게 해준다. 일본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이 기획해 지난해 8월 열었던 전시로, 교토 국립근대미술관을 거쳐 서울을 찾았다. 아시아와 중동 출신 작가 18명의 작품 250여점이 나왔는데, 모두 구체적 대상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작가들의 감정과 내면의 울림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단순히 연필이나 콩테, 펜 등으로 선을 그린 전통적 드로잉뿐 아니라 드로잉적인 요소가 많은 회화, 드로잉을 이용한 애니메이션, 설치작품까지 폭이 넓어 드로잉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5개의 전시실 가운데 맨 첫 공간은 식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모였다. 일본의 이케무라 레이코가 종이 위에 파스텔로 그린 '사랑의 나무' 시리즈는 식물의 뿌리나 가지 위에 사람의 머리를 매다는 등 사람이나 동물의 일부와 식물을 접합시켰다. 인도 작가 아디티 싱의 꽃 그림들은 동양적인 여백의 미를 보여준다. 여백을 통해 더욱 모티프를 강조했는데, 꽃의 모습이 마치 우주 속 빅뱅 같다.
제2전시실에서는 초상을 그린 한국, 일본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김정욱씨가 한지에 먹을 사용해 그린 공허하고 커다란 눈의 인물들은 공포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고니시 도시유키는 구불거리는 선으로 표현한 사람 모습 위에 붉은색의 작은 점을 찍어 눈을 표현했다. 인종이나 나이,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초상들이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 번째 공간으로 가면 드로잉의 의미는 보다 확장된다. 태국의 여성 작가 피나리 산피탁은 1990년부터 최근까지의 드로잉 작품들을 기다란 탁자 위에 눕혀놓았다. 여성의 가슴과 그릇이라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을 여성의 관점에서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들이다. 나지막한 탁자 위에 놓여진, 시간의 흐름을 품고 있는 작품들을 보려면 한참 몸을 숙여야 한다. 그 옆으로는 이집트 여성 작가 아말 케나위의 드로잉들이 빠른 속도로 스크린 위를 흐릿하게 스쳐간다.
일본 작가 츠지 나오유키의 '우리가 있는 곳'은 드로잉으로 구성된 애니메이션이다. 여러 장의 종이를 연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종이 위에 드로잉을 그렸다가 지우고 다시 그림을 그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됐다. 이 때문에 다음 그림 위에는 이전 장면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드로잉만의 독특한 시간적 흐름은 느릿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 전시실에 걸린 김소연씨의 작품은 유화지만 드로잉의 느낌이 강하다. 인간의 감정과 내면을 빠른 붓질로 화폭에 담아내는 드로잉적인 방식으로 작업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드로잉은 감각적인 것을 재빠른 작가의 직관으로 풀어내기 때문에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조립되거나 혹은 분해되는 의식의 콜라주 같은 공작소"라면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구분지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굳이 나누자면 좀 더 상상력이 발휘되는 공간이 드로잉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4월 19일까지, 관람료 1,000~3,000원.
메인 전시와 별도로 미술관 내 드로잉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허윤희씨의 전시(3월 15일까지)도 둘러볼 것을 권한다. 나뭇잎을 소재로 작업하는 허씨는 가로 12m, 세로 4m에 달하는 한쪽 벽에 거대한 드로잉을 그렸다. 사람 키만한 나무막대기 끝에 목탄을 달아 작업했다. 전시장 바닥에 뿌려진 목탄 가루들이 작품의 공간을 더욱 확장시킨다. 작가가 작업실 근처 북악산을 산책하며 매일 주운 나뭇잎을 그리고 그 아래 짧은 글을 붙인 '나뭇잎 일기'도 재미있다. (02)425-1077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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