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기업들에게 쌓아둔 100조원을 투자해 줄 것을 촉구했다. 어려울 때 대기업들이 희생적 투자에 앞장서는 것이 근로자에게 희망을 줄 것이라는 뜻이었다.
다들 움츠리고 있을 때 대기업의 과감한 투자는 경제회복의 견인차가 될 수 있다. 지난 30년간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10여년 전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한 것도 대기업들의 왕성한 투자가 결정적인 힘이 됐다.
사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의 투자 급감현상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투자가 급감하면 내수침체가 길어지고, 일자리대란도 확산될 수밖에 없다.
신빈곤층이 쏟아지면 사회시스템이 위기를 맞게 된다. 여당대표가 오죽 답답하면 대기업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솔선수범)’를 호소했겠는가? 실제로 실물경제 침체가 본격화한 지난해 4분기 설비투자는 전분기보다 16.1%나 격감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대기업 600개사의 올해 투자규모는 지난해보다 2.5% 감소한 86조7,593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대기업 투자규모가 감소한 것은 2001년 이후 처음이다.
이런 상황에 여당 대표의 투자 촉구는 수긍이 가지만, 경제위기의 책임을 대기업에 전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 문제다. 대기업들도 생존에 부심하는 상황에서 100조원이나 유보금을 쌓아두고 있다는 주장은 생뚱맞다. 돈을 금고나 통장에 넣어둔 채 흑자도산할 바보기업은 없다. 유보금 규모에 관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대기업들은 불황을 핑계로 감원부터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며 고용 유지에 최대한 힘써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여당은 투자를 촉구하기에 앞서 규제부터 풀어주는 데 힘써야 한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입만 열면 규제 완화를 약속했지만 법인세 인하 등 일부 세법과 시행령 개정 외에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 큰 틀의 규제완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규제개혁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부터 자성해야 한다. 환경개선은 안 해주고, 투자를 압박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잡으라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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