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포츠를 이끌어나갈 수장에 박용성씨가 선출됐다. 어느 때보다 격렬하고 긴장된 선거 과정을 거쳐 과반수에서 1표를 더 얻었다. 중량감 있는 여러 후보가 대거 출마하여 유례없이 치열하게 전개된 선거 과정을 되새겨 보면 1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확정된 것은 의미가 크다.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 체육의 역사에서 그 수장의 ‘정통성’이 늘 정치적 혐의를 받아와서다. 국가가 체육 행정을 완전히 직할 통솔할 때는 물론이고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 차원에서 ‘미는’ 사람이 수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관행이었다.
현 정권 들어서도 한나라당 전현직 의원 다섯 명이 경기단체장이 되었으며 한국 체육의 큰 축이 되는 국민생활체육협의회(이강두), 국민체육진흥공단(김주훈), 한국마사회장(김광원) 등도 모두 여당 인사 일색이다.
최근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유영구 전 명지학원 이사장을 제 17대 총재로 재추대한 바 있다. 애초의 합의 추대가 문화부의 입김에 의하여 사실상 좌초되었다가 다시 석연치 않은 물밑 과정을 거쳐 재추대된 것이다.
모 정치인이 KBO 총재를 강력히 원하는 바람에 유영구씨를 체육회장 쪽으로 권유하였다가 결국 여러 정황이 여의치 않아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분분했다. ‘관치 체육 탈피 원년’은 아직 먼 나라 얘기라는 말이다.
이런 과정의 정점에서 체육회장 선거가 치러진 탓인지 정작 뜨겁게 달아올랐어야 할 정책과 비전은 그리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쟁점 없이 달아오른 선거란 그리 상쾌한 일이 아니다. 정책과 비전의 대결이 아니라 세력이나 지명도의 다툼이 두드러졌다.
신임 체육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는 한둘이 아니다. 정부와의 관계 재설정, 유관단체 통폐합, 재정 안정화, 체육외교 활성화 등 난제들이 쌓여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단 한가지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운동 선수에게 희망을!’이라는 말을 제시하고 싶다.
지금 한국 체육은 ‘화려한 황혼’이다. 2002 한일월드컵과 2008 베이징올림픽이 말해주다시피, 특정 종목에서 특정 선수들이 빛나는 성취를 이룩한 것은 역사적인 쾌거이지만 그 이면엔 취약한 구조 아래 신음하는 수많은 무명 선수들이 있다.
몇몇 스타 선수들을 제외하면 운동으로 이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과연 생계라도 유지할 수 있을까 염려되는 선수들이 많다. 비인기 종목은 말할 것도 없고 인기 종목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운동 이외의 그 어떤 교육이나 가능성을 배울 기회가 차단돼 있다. 그래서 늘 과도한 긴장과 훈련의 나날을 보낸다. 부상이나 슬럼프를 만나기라도 하면 자칫 낙오자가 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사회가 바로 ‘월드컵 4강’, ‘올림픽 7위’의 우리나라 현실이다.
10대 초반에 유망주로 뽑히기라도 하면 모든 사회적 교육과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 오로지 운동 하나에만 매달려야 한다. 기형적이다. 대다수 무명 체육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아직은 투명하지 않다. 이 때문에 체육인 스스로 약간의 열패감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박용성 회장은 국제 대회의 가시적인 성과에 급급하기 보다는 수많은 무명 선수들의 여건 개선과 미래 비전을 위해 힘써주기를 바란다. 그 자리는 정치적이며 외교적인 자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체육인의 꿈을 책임지는 자리다. 이 나라의 수많은 체육인들이 다른 분야의 사회인들처럼 안정적인 생활 기반과 직업적 자긍심을 갖게 되는, 그런 미래를 위해 박용성 회장은 무엇보다 현장을 확인하고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해야 할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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