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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8> 하길종, 그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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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58> 하길종, 그 아름다움

입력
2009.02.2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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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종. 그가 내 머리 속에 남기 시작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그와 한 방을 쓰고 한 이불 속에서 살을 맞댄 채 그의 옛날얘기에 취해 잠이 들던 그 때부터 그는 나의 우상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 모두가 그를 좋아하였다. 우리는 큰형 가족을 포함하여 열두식구가 살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모두들 마당에 모여 앉아 그의 웅변을 듣는 게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그의 웅변 실력은 대단했다. 폼도 기가 막혔다.

목소리도 쩡쩡 울렸다. 때로는 영어 웅변을 하였다. 식구들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고등학교 1학년인 그는 전국학생영어웅변대회에서 상을 받은 공인된 웅변가였다. 당연히 식구 모두가 그의 팬이 되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더 좋았다. 12명이 옹기종기 한 상에 모여 앉으면 그 앞에 놓이는 국과 밥이 달랐다. 국에 고기도 좀 더 들어가고 밥도 더 많았다. 맛있는 반찬도 그 앞에 놓여졌다. 나는 늘 그 곁에 앉았다.

동네아이들은 그를 '하길동'이라고 불렀다. 방과 후 '금화초등학교' 운동장은 동네 운동장이었다. 주변에 있는 몇 개 동네 아이들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늘 싸웠다. 우리 '천연동' 아이들은 숫자도 적고 순해서 늘 싸움에서 밀렸다. 마침내 어느 주말 사고가 일어났다. 야구를 하던 우리들을 건너편 동네 고등학생들이 글러브까지 뺏고 쫓아낸 것이었다. 아이들이 길종 형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하였다. '금화산' 꼭대기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그가 바람 같이 동네로 날아왔다. 드디어 '맞짱'을 뜨게 됐다. 주변 동네 아이들이 학교운동장에 모두 모여들었다. 상대는 서대문 일대에서 '제일 쎈 주먹'이었다. 더구나 길종 형보다 2학년이 위인 고3이었다. 그러나 게임은 싱겁게 끝났다. 2, 3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몸이 한 순간에 공중으로 날아올라 상대의 얼굴을 두 발로 가격하였다. 비틀거리다 쓰러진 상대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상대 패거리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이후 우리 동네 아이들은 어깨를 펴고 놀 수 있었다.

그의 소문은 커서도 이어졌다. 대학가에서도 사회에서도. 아니, 그의 용기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4.19의 중심에 섰고 군사독재와 싸웠다. 그가 추방 되었다. 그가 영화를 만나게 된 인연이 바로 그 때였다. 이 나라가 데모꾼인 그를 보낸 곳이 바로 할리우드였으니 말이다. 영화를 만난 그는 마치 물 만난 고기 같았다. 끼와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암울한 한국사회에 영화를 통하여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며 보무 당당하게 귀국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되고 우울한 꿈이었다. 그의 영화와 함께 한 9년간의 시간들, 그가 우리에게 남긴 몇 편의 영화는 오히려 그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자본과 체제는 그의 영혼과 신체를 무참히 짓밟았다.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일어났다가 쓰러지고 다시 일어났다가 쓰러졌다. 그는 그 때마다 글을 쓰고 강단에 섰다.

그래서인지 그가 남긴 몇 편의 영화보다 그가 보여준 그의 영화정신이 나와 영화 후배들 가슴 속에 더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깊은 산 속 사슴처럼 살다간 하길종. 포수가 사냥총을 겨냥해도 눈만 껌벅이며 바라보던 그, 하길종. 만들고 싶은 영화를 못 만들 때, 글을 썼고, 한국영화를 비평하며 영화 현실을 개탄했고.

강단에서 후학들에게 영화정신을 외쳐댔던 하길종. 있는 자 보다는 없는 자, 잘 난 자 보다는 못 난 자 편에 섰던, 강한 자에게는 강했고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했던 하길종. 그가 왜 요즘 자꾸 그리워지는 걸까? 스탭들이 빈주머니를 뒤지며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감독료를 털어 보내던 그의 모습이 생각난다. '엉터리'들이 떠들어대면 당당하게 나서서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자만 나오라"고 외치던 모습이 그리워진다.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와 평화가 왔건만 오히려 사이비는 더 기승을 떠니 또 다시 그가 그리워진다. 갔으나 가지 않은 그가 우리 곁에 있기에 용기가 생긴다. 헤어진 지 한 세대가 지나도 '도망가지 마라'던 그의 말 한마디가 나를 바로 세워주고 있다.

"길종 형, 언젠가 그대가 꿈속에서 만나 나에게 보여준 그 천국을 새 시나리오에 넣었다오. 너무도 아름다워 우리는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지. 나는 그대가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오." 나는 신작 '주문진'시나리오 집필을 하며 아주 오래 전 그와 꿈에서 만나 가 본 곳을 떠올렸다. 우리는 꿈속에서 험한 길을 오래오래 걷다가 마침내 신비한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 곳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영화에서도 꿈속에서도. 우리 둘은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그냥 걷기만 했다. 흐르는 강물도 풀잎도, 꽃잎도 나는 새들도 이 세상에서 본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그와 발견한 신세계를 오랫동안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 세계를 내 영화 속에 재현하여 보려고 한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그가 내 곁을 떠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옛날처럼 형수도 만나고 조카도 만나 같이 생각하고 같이 생활한다. 그의 친한 친구들과도 그가 살아있을 때처럼 만나고 연락한다. 영화를 준비하고 시나리오를 쓸 때도 그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전개시켰을까 먼저 고민한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나는 외롭지 않다.

언제나 그와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2월 28일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모처럼 영화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의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와 같이 생활을 하지 않았던 젊은 영화인들도 많이 모인다. 그가 내 곁에 없어도 늘 내 곁에 있듯이 그를 못 본 젊은 영화인들도 나처럼 각기 그들 곁에 그가 있음을 알고 있다.

형은 자기가 태권도 초단이라고 자랑했지만 나는 5급이면서도 '뻥친다'며 놀려주곤 했다. 그의 태권도 폼은 고단자보다도 훨씬 멋있었다. 그는 유달리 '이소룡' 영화를 좋아하였다. 이소룡을 볼 때마다 어렸을 때의 자신을 상상하였는지 모른다. 그가 신세계에서 이소룡과 만났다면... 어땠을까... 서로 폼을 잡으며 겨루기를 했을까? 오늘 밤 그 꿈이나 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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