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 만찬 자리. 헤드테이블에 앉은 노 전 대통령이 처음 만난 미국 정ㆍ재계 고위층과 눈인사를 했다. 자칫 어색하고 서먹했을 법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면서 노 전 대통령과의 대화를 통역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한미재계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19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조석래 현 회장을 제32대 회장으로 재추대한 직후 재계 관계자가 소개해 준 일화이다. 실제 조 회장은 지난 2년간 정부와 재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노력했고, 전경련 위상을 끌어올리는데도 기여했다는 게 일반적인 재계의 평가이다. 감소세가 이어지던 전경련 회원사도 지난해부터 상승세로 전환됐다. 재계 총수들은 조 회장 연임에 대해 만장일치로 지지 의사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 전경련 회장직을 연임한 경우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5연임),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김각중 경방회장(이상 2연임) 뿐이었다.
2년 더 경제계 수장의 책무를 맡은 조 회장의 경제위기 극복책은 무엇일까. 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선 기업 경쟁력을 먼저 갖춰야만 하며, 이를 위해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구조를 개선하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사가 있어야 일자리도 있는 것이지, 회사가 망하면 일자리도 없다"는 소신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특히 "지금 우리 사회 일부는 매우 높은 임금을, 다른 곳은 턱 없이 낮은 임금을 받는 불균형이 심각하다"며 "이런 불균형이 우리 기업들을 해외로 내 보내고, 대ㆍ중소 기업 상생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 회장은 이어 "기업들은 국제 무대에서 다른 나라들과 경쟁해야 하는 만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노사 관계를 우리나라에도 적용, 같은 조건에서 싸울 수 있게 해야 한다"며 "노동시장 유연성은 근로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즈니스 기회를 넓혀 일자리를 더 만들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거센 반론이 예상되는 발언이지만,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게 조 회장의 철학이다.
그는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도 "기업들은 나라에서 교육시킨 사람들을 사용하는 고객"이라며 "세계 무대에서 나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데, 지금 우리 시스템은 창의적인 인재보다는 획일적인 사람들만 양산하는 구조"라고 꼬집었다.
조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점도 재계 입장에선 든든할 수 밖에 없다. 그는 지난 1년간 정부의 경제 대책과 관련, "수도권 규제 완화와 투자 촉진 위한 세금 감면 등이 이뤄진 점에서 '비즈니스프렌들리' 정책의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 동안 소원했던 LG와 전경련 관계가 새 전기를 맞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다. 이날 총회에서 허창수 GS 회장이 강덕수 STX 회장과 함께 부회장으로 선임된 것이 포인트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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