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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시네마 천국'/ 서울 실버영화관 개관 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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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의 '시네마 천국'/ 서울 실버영화관 개관 한달

입력
2009.02.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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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여배우 몸매가 어쩜 그리 이뻐.""그러게, 뒤태가 아주 잘 빠졌어." "그런데, 진짜 다 벗은 거야? 대역 쓴 거 아녀?""요새는 다 진짜로 벗는대." "꼭 나 젊을 때 몸매 보는 거 같았어." "뭐? 호호호….­"

18일 오후 서울 종로 낙원상가에 자리잡은 실버영화관.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그린 영화'미인도'를 관람하고 나온 할머니들의 수다로 극장 앞이 왁자했다.

초등학교 동창회라고는 하나 평소에는 점심이나 한 끼 같이 하고 집으로 향하는 게 고작이던 13명의 할머니들은 이날 영화 속 여주인공의 아픈 사연에 할 말이 더 있다며 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옥주(63)씨는 "노인네들끼리 모여봐야 밥 먹고 나면 마땅히 갈 곳도 없어 그냥 헤어지곤 했다"면서 "노인들을 위한 극장이 생겼다고 해서 와 봤는데, 모두들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21일로 개관 한 달을 맞는 '실버영화관'에 은발의 영화 마니아들이 몰리고 있다.

서울시가 지원하는 실버영화관은 국내 처음으로 문을 연 노인전용 극장. 그렇다고 번듯한 단독 건물이 있는 건 아니다.

낙원상가 4층 허리우드극장 내 3개관 중 한 곳인 클래식관(300석)에서 추억의 명화와 최근 개봉작을 2주 단위로 1일 3회(오전 10시30분, 낮 12시30분, 오후 2시30분) 상영하고 만 57세 이상이면 누구나 2,000원으로 부담 없이 영화를 관람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서울시가 실버영화관을 열게 된 계기는 지난해 50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노후생활 전반에 대한 설문조사였다. 당시 응답자의 33%가 노인 문화생활을 위해 서울시가 힘써줬으면 하는 분야로 영화를 꼽았다.

탑골공원 등 평소 노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모인 '실버문화 중심지' 종로 한 복판에 실버영화관이 들어서자, 노인들은 더없이 반가워 했다.

극장측에 따르면 지금까지 약 4,000명의 노인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회당 평균 100명 가량이 관람한 것이다.

자칭 '실버영화관 마니아'인 구광서(70) 할아버지는 "젊을 때 이후 처음으로 영화관을 즐겨 찾게 됐다"며 "속삭이는 대사 같은 건 놓치기 일쑤라 영화마다 최소한 두 번은 봐야 한다"며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강성모(80) 할아버지도 '미인도'와 지난달 상영한 '벤허'를 각각 세 번씩 봤다고 한다. "나이를 먹어서 아무리 집중해도 한 번 보면 뭔 얘긴지 몰라. 값이 싸서 부담이 없으니 계속 볼 수 있지. 요즘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는 영화 보러 가는 게 최고 인기라우, 허허."

실버영화관 인기 비결은 노인들 취향에 맞는 영화를 저렴한 가격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30년 전 수준인 관람료 2,000원도 비싸지 않지만, 극장에서 10분 거리인 서울노인복지센터 1층에 비치된 할인쿠폰을 가져가면 1,000원 깎아준다.

복지센터 관계자는 "복지센터에서 검표원 자원봉사자 파견 등 실무적인 운영을 돕다 보니 극장측으로부터 유일하게 할인쿠폰을 제공받고 있다"며 "현재까지 800장 정도가 사용됐다"고 말했다.

상영작은 관람객과 복지센터를 이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선정한다. 편당 2주 상영이 기본으로, 개관 당일 하루만 상영한 '자유부인'을 비롯해 '벤허' '미인도' 등 세 편이 관객과 만났고, '맘마미아' '여고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이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허리우드극장 김은주 대표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영향 때문인지 한 신부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내용의'미션'을 상영해달라는 전화 요청이 하루 십여 건 씩 걸려와 당초 7월께 상영하려던 것을 17일부터 하루 2차례(오후 5시30분, 8시) 특별 상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극장을 찾은 김모(61)씨는 "한 달 전 용산의 극장에 갔는데 젊은 사람 천지인데다 영화표 한 장 사는데도 할인카드니 뭐니 복잡하게 묻는 말이 많아 괜히 주눅이 들었다"며 "여기는 그냥 '두 장이요' 하면 표를 내줘 일단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앞으로 남편이랑 한 달에 두 번씨 꼬박꼬박 오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실버영화관은 서울시와 ㈜SK케미칼로부터 일정액의 운영지원금을 받고 있으며, 호응도를 보고 내년 이후 지원 여부가 결정된다.

김 대표는 "현재 운영비의 40% 가량을 지원 받고 있어 지원이 끊기면 힘든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입소문을 타고 점점 관객이 늘고 있는데다 직원들 손 붙잡고 '이 영화관 없어지면 안 된다'고 걱정하는 어르신들을 생각해서 어려워도 운영해 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장재원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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