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뒤면 달에 과학자들이 상주한다죠? 천문학자가 달에 살게 되면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합니다. 지구와는 다른 별자리를 보는 것이거든요."(성언창 소백산천문대 대장)
"낮과 밤이 보름씩 되는 달력도 새로 만들어야죠. 물론 달은 지구행성의 식민지니까 현재 국제우주정거장(ISS)이 그렇듯 지구 시간을 표준으로 삼겠지만, 결국 달 주민이 독립하려 들겠죠. 중성자별처럼 엄청 중력이 센 별을 도는 행성은 어떨까요. 여기선 섭동(攝動·다른 천체의 중력으로 행성의 궤도가 달라지는 것)이 워낙 강해서 상대성이론이 먼저 발견될 겁니다. 뉴턴 역학 문제는 너무 어렵다며 쩔쩔 매겠죠, 하하."(이명현 연세대천문대 연구원)
"래리 니븐의 SF <뉴트론 스타> 에도 고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외계인이 기조력을 몰라서 고민하는 내용이 나와요. 위성이 없는 행성에 살기 때문이죠."(소설가 김창규씨) 뉴트론>
"아시모프의 <전설의 밤> 에는 태양 여섯 개가 있는 행성이 등장해요. 1,000년마다 문명이 멸망해서 왜 그럴까 했는데, 알고 보니 1,000년마다 태양이 일렬로 늘어서고 일식이 일어나서 사상 처음 밤을 맞은 주민들이 혼란에 빠져 불을 낸다는 거였어요. 늘 낮이었던 세상에 '앗, 별이 보인다'며…."(박상준 오멜라스출판사 대표) 전설의>
11일 소백산국립공원 내 소백산천문대에 일군의 소설가들이 천문학자들을 찾아왔다. 흰 눈에 뒤덮인 산 꼭대기는 저 아래 땅과는 다른 세상이었고, 그들은 수백억 년의 시간과 고차원의 공간을 넘나들었다. 13일까지 2박3일 동안 열린 '세계 천문의 해 SF 창작워크숍'이다.
산에 오른 이들은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SF작가 8명. 김창규, 김보영, 배명환, 박성환, 정소연씨 등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에 입상한 작가가 대부분이다. 작품집 <셋을 위한 왈츠> 로 이름을 알린 신예 소설가 윤이형씨도 "제대로 된 SF를 써보고 싶다"며 동참했다. 셋을>
고전문학을 전공한 문학박사 유광수씨는 벽에 걸린 성변측후단자(조선시대 관상감에서 밤하늘을 관측하고 기록한 보고서)를 보고 한눈에 빠져들었다.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단편 '정크'를 발표했던 캐나다 작가 고드 셀러씨도 동참했다.
어떤 소설인들 자료와 경험이 들지 않으랴만 SF에는 그 이상의 공부가 필요하다. 배명환씨는 지동설이 음모라는 내용의 단편 '엄마의 설명력'을 쓰기 위해 3개월 동안 책과 논문, 인터넷을 뒤졌지만 "독학에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첨단 연구까지 나아가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이번 워크숍은 그들에게 그래서 절실한 자리였고, 최초의 시도이다. 오멜라스출판사는 이번 워크숍의 결과물로 가을쯤 SF단편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쓰기도 어렵지만, 변방의 장르문학으로 치부되는 SF에는 어떤 매력이 있을까. "과학 자체를 쓰려는 건 아니에요. 모든 문학은 결국 현재이고 인간이죠. 하지만 SF는 있는 그대로 직선적으로 현재를 보지 않는 다른 시선을 던져주거든요."(김보영)
"SF는 현대에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를 다룹니다. 가령 더 똑똑해질 수 있는 과학기술이 등장하면 당신은 이것을 선택할까요? 이것이 SF가 다루는 이슈들이고, 내가 SF를 쓰는 이유입니다."(고드 셀러)
작가들은 천문대 시설을 둘러보고, 강의를 듣고, 해질 때부터 바빠지는 관측생활도 눈여겨 보았다. 아이디어를 나누는 브레인스토밍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었지만 사실은 모든 대화가 그랬다.
쭈뼛거리며 "만약 빛이 지구 둘레를 빙빙 돌면 내가 내 뒤통수를 보게 되는 건가요?"라고 질문한 작가에게 천문학자는 "비슷한 발상의 우주이론이 있다"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상상력은 훨씬 더 과감했다. 이 박사는 외계지적생명체찾기(SETI) 프로젝트가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에 대해 "100년쯤 지나면 인간도 사이보그화할 테고 그러면 전파통신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도 했다. "왜 우주탐사를 하는지 온갖 이유를 대지만 어쩌면 DNA의 회귀 본능, 우주로 퍼지려는 생존본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생명체를 이루는 물질은 결국 별이 진화하면서 생긴 원소들이거든요.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우주로 빨려드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래서일까, 작가들은 "말씀하신 거 직접 쓰면 훌륭한 SF 되겠는데" "글 쓰는 데 천부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고 수군거리더니 급기야 야식을 앞에 놓고 거꾸로 '글쓰기 멘토링'에 돌입했다.
초신성 관측을 놓고 수백년 시간을 뛰어넘어 교감을 갖는 천문학자 이야기가 어떠냐는 문홍규 한국천문연구원 박사. 그에게 작가들의 조언이 쏟아졌다. 소백산 등성이에는 먼 우주에서 온 별빛이 쏟아졌다.
●소백산천문대는
1978년 고도 1,390m의 소백산 연화봉 능선에 개관한 한국천문연구원 소백산천문대는 일제강점기에 맥이 끊긴 조선시대 관상감을 잇는 국립 천문대이다. 61㎝ 지름의 소백산 망원경은 이제는 웬만한 시민천문대 망원경보다 규모가 작다.
하지만 만만히 볼 수 없는 백전노장이다. 1970년대 볼러&치븐스 사의 60㎝~1m급 망원경들이 전 세계에 팔린 것이 약 30대인데 그 중 아직도 팔팔하게 관측중인 망원경은 소백산천문대의 것이 유일하다.
과학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도 한 해 5~6편씩 배출한다. 최근 천문연구원 이재우 박사팀이 쌍성 행성계를 세계 최초로 발견한 것도 여기서 가능한 일이었다.
연구자들은 소백산천문대와 대전 천문연을 1주일씩 오가며 교대한다. 해질녘이면 불빛이 새지 않도록 이중 커튼을 치고 밤새도록 관측한 뒤 오전에 잠을 잔다. 물론 천문학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비 오는 날은 예외다.
소백산=김희원 기자 h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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