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 지음ㆍ정영목 옮김/해냄 발행ㆍ267쪽ㆍ1만2,500원
장생불사(長生不死)는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실명하고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 인류 본성의 밑바닥을 보여줬던 <눈먼 자들의 도시> 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87)는 이번에는 '죽음이 소멸된 사회'라는 세계를 가상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놓여진 사회, 경제, 도덕적 문제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눈먼>
"다음날, 아무도 죽지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라는 첫 문장이 암시하듯 갑자기 죽음이 소멸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현세에서 '불멸'의 권리를 얻게 된 사람들, 태초 이래 인류의 가장 큰 꿈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새 생명은 진실로 아름답다"고 외치며 집단적 환희감에 빠져든다.
하지만 웃는 사람이 있으면 우는 사람이 있는 법. 죽음의 협력 거부라는 난공불락의 벽에 부딪힌 장의업계는 정부에 가축 매장과 화장사업의 독점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죽지 않는 환자들로 만원을 이룬 병원에서는 환자를 복도에 내어놓는다. 돌봐줄 환자가 없는 호스피스들도, 생명보험 해약 요구가 빗발치는 보험사들도 통곡의 벽에 머리를 찧는다. 근본적 존재 위기에 빠진 것은 교회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이 없으며, 부활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무의미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죽음의 중지로 인한 사람들의 환호는 '지옥의 종소리'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희망과 절대 죽지 않는다는 공포 사이에 던져진 인간군상의 모습이 한폭의 만다라처럼 그려진다. 정부가 특별한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사이, 죽음 직전의 가족을 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찾는다. 아직 죽음이 활동하는 국경 너머에 죽을 병에 걸린 환자들을 데려가주는 마피아는 이제 자선조직이 된다.
방송사 사장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면서 혼란의 7개월은 종식된다. 편지의 발신자는 '죽음'. 죽음은 이 실험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건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이었어요. 물론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언제까지나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말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것처럼 동의어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걸 솔직히 고백해야겠군요."
줄 바꾸기와 인용부호 따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작가 특유의 문장도 여전하다. 책을 덮고 나면 공자가 던진 '삶을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未知生 焉知死) 하는 무거운 철학적 질문이 한 노대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어떻게 형상화했는가를 깨닫고 그 긴 여운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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