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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낡은 아파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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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낡은 아파트의 기억

입력
2009.02.19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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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태어나 마땅히 떠올릴 고향 집이 없는 나는 누군가 고향을 묻거나 까닭 없이 어디론가 가고 싶어지면 종종 어린 시절 오랫동안 살았던 아파트를 떠올리곤 한다.

시에서 지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였던 그곳은 옥상에 노란색 물탱크가 태양처럼 얹어져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태양보다 먼저 그 물탱크와 눈이 마주쳤다.

넓은 동과 동 사이에는 주차장이 있었지만 꽉 들어차는 일이 별로 없어서 친구들과 거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거나 오징어나 달팽이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밤늦도록 게임을 했다.

잔디가 푸르던 언덕배기에서는 날이 좋으면 옷에 풀물이 들도록 구르며 놀았고 놀이터 뒷산에 열리던 새빨간 산딸기를 맛도 모르고 툭툭 따먹곤 했다.

그 아파트를 떠나고 십오 년쯤 지난 후에, 짧은 기간 혼자 머물 생각으로 집을 찾다가 중개인의 소개로 다시 그 아파트 단지를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십오 년이 지나는 동안 노쇠할 대로 노쇠해진 아파트는 노인네 얼굴처럼 외벽에 잔뜩 금이 나 있었다. 노란색 물탱크는 색이 바래고 때가 묻어 쓰레기통처럼 보였다. 간혹 쥐가 들어오기도 하던, 1층까지 연결된 부엌 쓰레기통은 시멘트로 막혀 있었고, 아파트 동과 동 사이 주차장은 온갖 종류의 차들로 꽉 차 있었다. 낮은 언덕배기의 잔디는 탈모를 앓는 중년처럼 듬성듬성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언덕을 구르며 놀았고 차들을 피해 놀이를 하고 있었다. 노는 아이들이 자주 터트리는 환한 웃음 앞에서는 아파트 외벽의 잔금도 낡은 우편함도 시커먼 물탱크도 맥을 못 췄다. 그 아이들 중 누군가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내심 그 아파트를 고향으로 떠올리게 될지도 몰랐다.

얼마 전 친정을 가던 길에 다시 들른 그곳은 이미 한눈에 층수를 헤아리기 힘든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었다. 세련된 모습에 어린 시절을 지냈던 아파트 모습도, 철거 직전의 모습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노란색 물탱크는 보이지 않고 햇빛을 반사하는 유리창에 눈이 시렸다.

기억 속의 아파트와 전혀 다른 초고층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고 그제야 고향을 잃은 분들의 상실감을 알 것 같았다. 겨우 오래 전 살았던 기억 속의 집을 잃은 것을 가지고 그 아픔의 크기를 짐작하고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기에는 상실감의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지만 말이다.

그 쓸쓸함을 겨우 이해하게 된 무렵에 삶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 소식을 들었다. 명목뿐인 개발에 밀려 삶의 기반인 집과 가게를 잃은 사람들,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며칠 따뜻하던 바람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 바람이 견딜 수 없이 춥고 시린 사람들을 보면서 한번도 집을 잃어본 적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가족들이 무사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무엇보다 부끄러운 것은 그분들에게 이 짧은 2월의 추위가 끝나면 그래도 곧 따뜻한 계절이 올 거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람이라도 좀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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