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라는 글귀가 새겨진 김수환 추기경의 문장 깃발 아래서는 정파나 종파, 갈등과 반목은 없었다. 재임 중 추기경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었던 전직 대통령도, 불교와 기독교의 수장도 화합과 통합을 이야기했다. 추모 열기는 더 거세져 전국에서 올라온 일반 시민 조문객 14만2,000여명이 '사랑합시다'라는 추기경의 뜻을 되새겼다.
김 추기경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명동성당에는 18일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과 평범한 이웃들의 조문이 하루종일 이어졌다. 오전 6시에 빈소가 개방되기 훨씬 전인 오전 4시30분부터 김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대성전 앞은 북새통을 이뤘다. 오전 6시에 이미 1㎞ 가량 늘어선 줄은 오전 11시께 세종호텔, 명동역까지 3㎞ 가량 이어졌다.
추기경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다는 이재홍(59)씨는 "한없이 인자했던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10초 정도 김 추기경을 뵙기 위해 5시간을 기다렸지만 아직도 안타까운 마음만 든다"고 애도했다. 불심(53) 스님은 "토굴에서 수행하다 서울로 올라왔다. 불교나 천주교나 다 형제 아니냐"고 말했다.
홍준표 원내대표 등 한나라당 의원들도 오후 2시25분께 조문했다. 홍 원내대표는 "대한민국의 큰 어르신을 잃어 참 슬프다"고 애도했다. 한화갑 전 의원은 "추기경께서 모든 국민이 자기 인생을 성찰하고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할지에 대해 사랑의 선물을 주셨다"고 말했다.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 추기경과 인연을 맺었다는 김근태 전 의원은 "추기경은 시대의 아픔을 건너게 해 준 징검다리"라고 회고했다.
이날도 각 종교계 대표들이 추기경을 애도하며 종교의 벽을 허물었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는 "교파는 달랐지만 늘 존경하던 분으로 우리가 못한 말을 속시원하게 대신 해주셨는데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비통해했다. 조 목사는 자신을 영접한 조규만 주교와 악수를 하며 "종종 만납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운산 태고종 총무원장도 오후 4시30분께 빈소를 찾아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살아온 추기경은 많은 분들의 귀감"이라고 말했다.
대기업 회장 등 재계 인사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아침 일찍 빈소를 찾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비통한 표정으로 추기경을 애도했다. 취재진의 질문을 피하던 그는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분명히 좋은 것으로 가실 것"이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함께 온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김 추기경이 대우가 힘들 때 격려를 많이 해주셨고 김 회장도 세례를 받을 예정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비롯한 삼성 사장단 11명도 조문했다. 이 회장은 "큰 분을 잃었다. 생전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임직원 15명과 함께 방문했다. 현 회장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직접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추기경이 '애모'라는 노래를 직접 부르는 것도 들었었는데…"라며 애통해했다.
영화배우 안성기씨도 "추기경 이전에 다정다감했던 한 인간이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고교 선후배 관계인데 늘 밝게 길을 안내해주시던 큰 빛이셨다"고 애도했다. 연극배우 손숙씨는 "어른이 없는 시대에 사는 것 같아서 쓸쓸하다"며 울먹였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이희아씨도 "'사랑하세요' '용서하세요'라는 추기경의 말씀을 가슴에 새길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주한 이스라엘, 코트디부아르, 독일, 에콰도르, 콜롬비아, 이란 대사 등 외교사절과 이기수 고려대 총장, 김한중 연세대 총장,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 등 교육계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이날 명동성당 측은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몰리자 800여명의 자원봉사자로 안전펜스를 배치하고 구급차를 대기시키기도 했다. 성당측은 일반인들의 조문은 19일 밤 12시까지만 받기로 했다.
장재용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