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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30년만의 단죄'/ 170만 학살속 '살아남은 어린이'는 피눈물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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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 '30년만의 단죄'/ 170만 학살속 '살아남은 어린이'는 피눈물을 뿌렸다

입력
2009.02.19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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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만~200만 캄보디아인을 죽음으로 내몬 ‘킬링 필드’가 17일 역사의 심판대에 올랐다. 국민 개조를 명분으로 이뤄진 이 잔학 행위의 가해자들이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를 단죄하려는 유엔의 노력으로 30여년 만에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AFP통신 등 외신은 “투올 슬렝 교도소 소장으로 근무하던 캉 켁 예우가 이날 첫 피의자 심문을 받기 위해 방탄차를 타고 프놈펜 임시수용소에서 인근 국제법정으로 들어갔다”고 재판의 시작을 알렸다.

더치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캉 켁 예우는 교사 출신으로 1970년대 중반 투올 슬렝 교도소장이 된 후 수감자를 무자비하게 고문, 처형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수감자 1만6,000여명 중 14명만 생존할 정도였다. 그는 재판에 앞서 “모든 잘못을 인정한다”며 용서를 빌었다. 캉 켁 예우는 1999년부터 캄보디아 군 특별수용소에 수감돼 있다.

투올 슬렝 교도소의 생존자로 재판 현장에 나온 농 참팰(39ㆍ사진)은 “캄보디아인들은 이 순간을 위해 30여년을 기다렸다”며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참팰은 교도소에서 살아남은 어린이 5명 가운데 1명으로 79년 베트남 군에 의해 구조됐다.

당시 총리 키우 삼판, 정권의 2인자 누온 체아, 외무장관이었던 이엥 사리와 그의 처이자 사회부 장관이었던 이엥 티리트 등 나머지 피의자들은 이날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그 동안 언론 등을 통해 학살에 관여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해왔다. 태국 인접 파이린 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이엥 사리는 “나를 심판하면 내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학살의 주역 폴 포트는 98년 사망해 재판에 회부되지 못했다.

이날 재판은 크메르루주 생존 지도자 5명 중 캉 켁 예우만 심문한 뒤 추후 절차를 결정하고 끝났다. AP통신은 “본격적인 증인심문 등은 3월말 시작되고 판결은 9월 이후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하지만 피의자들이 혐의를 부인하는데다 혐의를 입증할 특별한 증거가 없어 재판이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

‘킬링 필드’는 크메르루주가 1975년 미국의 비호를 받던 론 놀 장군의 군사정권을 몰아낸 뒤 론 놀 세력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집단 학살이다. 크메르루주는 ‘노동자, 농민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당시 캄보디아 인구(800만명)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동족을 처단하거나 굶어죽게 하다가 79년 베트남군에 의해 축출됐다.

이번 재판은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가 킬링 필드 주역의 죄를 묻기로 2000년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재판소의 성격 및 재판부 구성, 재판 형식을 둘러싼 논쟁으로 재판이 미뤄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6년 7월 유엔과 캄보디아가 정한 판사 15명으로 국제법정이 구성됐고 이후 2년 6개월동안 피의자 5명이 체포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기억하는 국민들이 피의자 5명만 회부된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만큼 재판이 정확하고 공정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관규 기자 qoo7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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